<오스만 제국 600년사>를 읽고
1299년부터 1922년까지 유지됐으며 전성기에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세 개 대륙을 다스리던 오스만 제국.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가장 오래 존속한 제국 중 하나로 세계사에도 큰 영향력을 끼쳤던 제국이었지만 정작 제대로 아는 게 별로 없는 오스만 제국이 항상 궁금했다. 근현대로 넘어오면서 세계사가 유럽 제국 중심으로 전개되다 보니 더 알려지지 않은 측면도 있다.
몇 해 전 박물관 유튜브 영상 튀르키예 카프탄 편을 찍을 때 감수를 받기도 했던 이희철 교수님의 <오스만 제국 600년사>는 오스만 제국의 시작에서 전성기의 정치와 문화, 외교, 경제 부분을 자세히 알려준다.
몽골 초원에서 아시아 서쪽과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주한 튀르크 인들은 10세기부터 수피주의자의 영향을 받아 이슬람 수니파에 귀의하고 세력을 확장했다. 초원 유목문화에 익숙했던 튀르크 인들이 아랍, 이슬람, 페르시아의 찬란한 문명을 만나 세력을 확장하며 수니 이슬람의 보호자가 되었다.
대셀주크 제국과 아나톨리아 셀주크 제국이 몽골의 침략을 받고 일 칸국이 세워지면서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오스만 부족이 등장했고 오스만 가지가 1299년 쇠위트에서 독립국가를 선언하면서 오스만 제국이 시작됐다. 오스만 가지를 뒤를 이은 오르한 가지는 비잔틴 상업도시 부르사와 니케아(현 이즈니크)를 정복했다. 오르한의 아들. 쉴레이만 파샤는 겔리볼루 성곽을 장악하고 아나톨리아의 농부, 유목민 등을 유럽 쪽으로 이주시켰다. 오스만 제국은 건국 90여 년 만에 세르비아 북부를 속국으로 만들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은 발칸 반도의 맹주가 되었다.
1453년 4월 22일 메흐메드 2세는 67척의 배를 육로를 통해 골든혼(금각만)으로 수송하는 기상천외한 작전을 감행해 콘스탄티노폴리스(현 이스탄불)를 함락시키며 제국의 전성기를 맞았다. 오스만 제국은 1500년대 쉴레이만 1세 때 헝가리, 발칸, 아나톨리아,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북부 아프리카, 메디나, 메카 성지를 포함,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세 대륙에 걸쳐 광활한 영토를 남겼다.
피정복자에 대한 관대한 정바카라, 다양한 문화를 포용하고 학문과 공예를 발전시키며 승승장구할 것 같았던 오스만 제국은 그러나 계속되는 전쟁과 러시아의 급부상, 후계자 계승 문제,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던 예니체리, 시대의 변화에 대한 인식 부족등으로 17세기말부터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술탄이 정해지면 다른 형제를 죽여도 된다는 형제살해법은 오스만 제국 발전의 발목을 잡았고 형제살해법이 없어지고 생겨난 카페스 제도는 술탄이 될 만한 이를 궁내에 유배시키는 형태로 이후 술탄이 되더라도 카페스에서의 트라우마로 훌륭한 리더가 될 수 없었다.
예니체리는 당초 기독교 가정에서 우수한 인재를 발탁한 능력 있는 군대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공고해진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이권이 침해받으면 거세게 저항했고 때로는 술탄을 처형하기까지 했다. 1826년 마흐무드 2세가 2만 6천 명을 처형하고서야 500년 만에 강제로 해산시킬 수 있었고 이들의 폐해가 얼마나 컸던지 예니체리의 해산은 '성스러운 사건'이라고 불렸다.
결말을 알고 읽는 역사지만 제국의 흥망성쇠는 대체로 비슷한 느낌인데 마치 인간사처럼 중간중간 많은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이 아마 더 그랬던 것은 혜성처럼 등장해 많은 업적을 이룬 시간은 짧고 300년 가까이 오랜 시간 힘겹게 유지했기 때문이기도 해서이다. 바카라의 뒷부분에 가면 개혁을 시도하는 술탄을 응원했다가 그 술탄의 비극적 결말에 안타까워했다가 하는 심정이 이어진다.
1923년 10월 29일, 무스타파 케말이 초대 대통령인 터키 공화국이 정식 출범했다. 무스타파 케말은 터키 국회로부터 '터키인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아타튀르크'라는 성을 부여받을 만큼 국민주권과 세속주의를 원칙으로 한 개혁정치를 성공시켰다.
이상은 바카라을 읽은 간략한 감상이다.
앞으로는 바카라 내용을 중심으로 오스만 제국의 역사를 조금 더 자세히 훑어보고자 한다.
튀르크족은 기원전 1700년대부터 최초의 거주지를 떠나 알타이 산맥과 톈산 산맥이 연결되는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초원 유목문화의 바탕에서 튀르크 인들은 흉노 제국을 세웠고 흉노 제국이 멸망한 후 6세기에 몽골 초원에 돌궐 제국을 세웠다. 돌궐이 ‘용감하다’는 뜻의 ‘튀르크’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돌궐의 멸망 이후 많은 튀르크 인들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아시아 서쪽과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주했다.
유목민이었던 터키인들이 아나톨리아반도에 정착하여 비잔티움 제국의 도시들을 정복한 뒤 유럽 '땅'에서 유럽인들을 대면한 것은 14세기였다. 그로부터 19세기까지 유럽과 오스만 제국은 생존을 위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서로 정치, 문화적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존했다. 그리고 16세기 초에 이집트 맘루크 술탄국을 정복한 이후 20세기 초반까지 대부분의 중동 지역을 지배했다. 아나톨리아반도를 중심으로 서쪽의 남동부 유럽 발칸반도와 동쪽의 중동 지역은 수 세기 동안 오스만 제국의 양 날개였다.
오스만 토후국은 지도자 오스만이 세운 나라였다. 오스만 부족의 역사는 오스만의 아버지인 에르투우룰이 쇠위트에 거주하면서 시작되었다. 셀주크 술탄에르투우룰에게 쇠위트를 내주었다. 에르투우룰은 추종자 무리를 이끌고 양 떼와 함께 이곳에 정착하였다. 에르투우룰이나 오스만도 '가지(gazi, 전사)'였다. 에르투우룰 사망(1281) 이후, 오스만이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인 비티니아(현 부르사-빌레지크-이즈니크 지역) 정복에 성공하자 변경의 전사들이 오스만에 몰리기 시작하였다. 야르히사르와 빌레지크 정복에 성공한 오스만 가지는 1299년 쇠위트에서 독립국가를 선언했다. 작은 변경 마을 '쇠위트'는 오스만 제국의 씨앗이 뿌려진 곳이 되었고, 이후 오스만 가지는 비잔티움 영토에 대한 정복사업을 수행했다.
오스만 제국은 수피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7세기 이래 성전을 주도한 아랍의 전사들과 달리, 튀르크 유목민 가지들은 이슬람의 엄격한 교리나 법에 경직되지 않은 유연한 태도를 보이며 수피즘에 관심을 가졌다. 변경에서 활동하는 이단 이슬람 신비주의자인 '데르비쉬'(이슬람 수피 종파의 수도자, 페르시아어로'문 앞''거지'라는 뜻이 있다.)의 포교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스만의 아들 오르한(재위 1324~62)이 그 뒤를 이었다. 그는 선친의 뜻을 이어 정복사업을 이어나가 1326년에는 비잔틴의 상업도시 부르사를 정복하였다. 오르한은 1327년 오스만 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은화를 발행했다. 부르사 정복 이후 오랜 기간의 포위작전 끝에 1331년에 비잔티움의 기독교 중심 니케아(현 이즈니크)도 정복했다.
오르한의 아들 쉴레이만 파샤는 겔리볼루 성곽을 장악하고 그곳을 유럽 쪽 트레이스반도를 정복하는 기지로 삼았다. 쉴레이만은 아나톨리아의 농부, 유목민과 생계 터전을 잃은 사람들을 유럽 쪽으로 이주시켰다. 이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발칸 지역으로 이어지게 하는 발판이 되었다. 그는 오스만 역사상 최초로 유럽 땅에 튀르크인을 정착시킨 인물이 되었다.
세르비아는 1371년 마리차강 전투,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남부는 오스만 제국에 병합되고, 북부는 제국의 속국으로 남게 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유럽은 튀르크 인들의 침략에 골머리를 앓게 된다.
1396년 바예지드 1세는 불가리아의 '니코폴리스'에서 10만 명이 넘는 유럽 연합 세력 군대와 맞붙게 되고 대규모 유럽 연합 세력에 맞서 승리했다. 이 전투 승리로 불가리아는 완전히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집트에 있는 이슬람 세계 종교지도자인 칼리프는 바예지드 1세에게 '룸 세계의 술탄'(유럽 세계의 술탄)'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1402년 7월 28일 오스만 제국은 앙카라 근처 추부크 평원에서 티무르와 맞붙게 된다. 오스만 제국의 주력은 기병으로 7만 명의 군대가 있었는데 티무르는 30여 마리의 코끼리 무장부대를 포함해 1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나왔다. '세기의 전쟁'이었던 이 앙카라 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의 군대는 참혹한 패배를 당했다.
티무르는 오스만 제국을 장악한 후 '군주의 배려와 용서'라는 이름의 칙령을 통해 피신해 있는 바예지드의 아들들에게 제국의 영토를 나누어주었다. 예상치 않은 일이었지만, 이는 훗날 후계자 구도를 어지럽게 만들며 제국의 운명을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지게 하였다.
무라드 2세는 술탄에 충성하는 상비군을 기독교 가정의 장정으로 조직하는 새로운 병역제도인 '데브쉬르메'를 시행하였다. 이로써 무라드는 성전에 매달리는 유목민 출신 가지들의 시대를 끝내고 상비 직업군 시대를 열었다. 데브쉬르메의 시행으로 국가 조직은 유목문화 전통에서 중앙집중적인 조직으로 이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무라드 2세는 부르사와 에디르네에 메드레세와 모스크를 대거 설립하였다. 메드레세는 일반적으로 '종교 학교'로 번역되지만, 그 기능과 역할을 보면 중세 서양의 '대학'과 같은 수준이다.... 메드레세 교육이 활발해지자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즘 활동도 활발해졌다. 그의 재위기에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로 된 저작물들이 오스만튀르크어로 번역되어 문학과 학문이 발전했다.
무라드 2세 시기 비잔티움에서는 술탄의 아들을 볼모로 보내기를 요구하는가 하면 무라드 2세의 삼촌 무스타파가 반역을 도왔다. 무라드 2세는 무스타파를 처형하고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다.
콘스탄티노플 점령에 실패하자 제2 도시 셀라니크를 정복하기에 이른다.
1451년 19세의 나이로 술탄이 된 메흐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목표로 삼았다.
메흐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위해 4개월 만에 루멜리 성을 완공했다. 뛰어난 전략가였던 메흐메드 2세는 비잔티움 황제의 항복을 먼저 요구한 뒤 헝가리 출신 대포 제작가 오르반이 만든 대포로 성벽을 공략했다.
콘스탄티노플이 성벽은 좀체 뚫리지 않았고 양측 공방전은 별 성과 없이 계속되었다.
메흐메드 2세는 4월 22일 67척의 배를 육로를 통해 골든혼으로 수송하는 기상천외한 작전을 감행한다.
골든혼 앞쪽의 성벽은 상대적으로 약했기 때문이다.
비잔티움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11세는 끝까지 맞섰지만 메흐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플 공격 54일째인 1453년 5월 29일 함락된다. 정복 다음 날, 콘스탄티노플 시내로 입성한 메흐메드 2세는 성소피아 교회를 사원으로 개명하고 군중과 함께 금요일 이슬람 예배를 집전했다. 천년 왕국 비잔티움 제국은 마지막 남은 황도가 무너지면서 이슬처럼 사라지게 되었다. 중세가 마감되고 근대가 열렸다.
메흐메드는 '세계 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준비된 이슬람교도 전사이자 군주였다. 그는 이스탄불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동방정교회 사람들(주로 그리스인)을 페네르(그리스어 파나르)에 거주하도록 허가하고, 다음 해인 1454년에 겐나디우스를 동방정교회의 총대주교로 임명하였다.
메흐메드 2세는 아랍의 제1차 콘스탄티노플 포위 공성전(674~78) 때 성벽 앞에서 전사한 아이유브 알 안사리의 묘지에 그를 성인으로 추앙하기 위한 모스크를 건설하였다. 알 안사리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교우로 그의 묘는 콘스탄티노플 정복 후에 셰이훌 이슬람이었던 아크솀세딘이 이스탄불의 에윕에서 발견했다. 1458년에 세워진 알 안사리의 모스크는 이슬람 성지가 되었고, 술탄이 즉위하면 알 안사리의 모스크에서 '착검식'을 하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이스탄불에는 모스크와 다른 슬롯 시설에 복합적으로 구성되는 퀼리예가 여러 곳에 들어서 이스탄불이 명실공히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임을 과시하였다. 주민 이주와 북구 재건사업을 마치고 1459년에 중앙조정의 모든 업무가 이스탄불에 이전되었다.
비잔티움에서 학자들의 두뇌 유출은 1200년대부터 1450년대까지 250년 동안 계속되었다. 비잔티움의 황제 마누엘 2세 팔레올로고스(재위 1391~1425)는 튀르크 인들이 그리스반도에 쳐들어오자 서유럽에 도움을 간청하기 위해 성직자크리솔로라스를 이탈리아 피렌체로 파견했다. 크리솔로라스는 피렌체 대학에서 그리스어를 가르쳤고, 호메로스와 플라톤의 그리스 철학 고전을 라틴어로 번역함으로써 중세 말기에 그리스 고전을 서구에 알린 선구자가 되었다. 크리솔로라스와 그리스 학자들의 활동 덕분에 1430년 경, 천년 동안의 적막 끝에 그리스 고전이 서방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오스만의 이주정바카라에 도움이 된 사람들은 이슬람 신비주의자들인 데르비쉬였다. 그들은 사람들이 거주하기 어려운 산악 지방이나 격리된 농촌 지역에 거주하며 이슬람을 포교하고 추종자들이 늘어나면 마을을 만들었다. 이들은 중앙에서 조성한 튀르크화 된 마을에 들어가 이교도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도록 선교활동을 하였다.
이처럼 한 곳의 인구를 다른 곳으로 강제로 이주시키는 것을 '쉬르귄'이라 하였는데, 오스만 조정은 전략적인 차원에서 마을 조성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지역에, 특히 수도의 인구를 늘리기 위해 '쉬르귄'을 시행했다. 비잔티움 제국의 도시로 상업이 발달한 부르사는 유대인이 많이 살고 있었다. 부르사를 정복한 오르한은 이곳을 수도로 삼고 경제 중심지로 부활시키기 위해 아드리아노플과 다마스쿠스에 있는 유대인 예술가와 환전상들을 부르사로 이주시켰다. 이스탄불이 수도가 된 직후에도 도시 인구를 늘리기 위해 무슬림, 기독교인, 유대인 등 신민들의 강제 이주가 있었다. 콘스탄티노플 정복 후 30여 년 동안 이스탄불 인구는 1478년에 11만 5천 명으로 늘었고, 종교별로는 무슬림 58퍼센트, 기독교인 32퍼센트, 유대인 10퍼센트로 구성되었다.
오스만 중앙조정은 이슬람교도가 아닌 원주민들의 '정복자'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이스티말레트'정바카라을 폈다. 이는 피정복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유연한 접근 방식으로 생명과 재산의 보호, 종교의 자유 보장, 전통관습의 인정, 정의로운 납세 등 대민 친화적인 행정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튀르크 슬롯에는 귀족계급이 없어 튀르크 인들이 정복지에 들어간대 해도 이교도들을 상대로 군림할 지배계층이 없었다. 이스타말레트 정바카라으로 발칸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코소보, 알바니아 등이 무리 없이 이슬람화 되었다. 소수민족집단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호의와 보호정바카라은 5세기 동안 오스만 제국을 유지하는 비결이 되었다.
유목국가가 아닌 정주국과의 전쟁이 늘어나면서 보병보다는 대규모 기병이 더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만든 것이 토지를 근간으로 만든 군사조직인 '티마르'제도였다. 기병은 이를 바탕으로 조직되고 공급되었다. 이 토지제도는 이슬람 세계와 셀주크 제국에서 시행한 '이크타'에서 기원하였다. 티마르 제도는 오스만 제국의 군사와 경제제도의 중추였다. 중앙조정으로부터 일정한 토지를 받은 지방의 토지 소유주가 농민으로부터 세금을 거두고 전시에 일정 수의 기병(시파히 cavalry)을 제공했다.
티마르 제도는 오스만 제국의 정예군대인 예니체리를 양성하는 데브쉬르메 제도와 함께 오스만 제국의 영토 확장과 전성기를 가져오게 한 양대 핵심 제도가 되었다. 티마르 제도는 1839년에 폐지되었다. '데브쉬르메'는 정복지의 청소년들을 오스만 제국의 충직한 병사나 행정가로 양성하는 제도로 무라드 1세 때인 1362년 '펜치크 법령'이 그 기원이었다. 데브쉬르메로 선발된 8~18세의 장정은 신병 예비부대(아제미 올란)에서 교육을 받았고, 교육을 마치면 '예니체리'예하 부대에 배치되었다. 보병인 예니체리 병사들은 '울루페'라는 봉급을 3개월마다 받았고, 40세까지 결혼이 금지되었으며, 군 복무 외 다른 일에는 종사할 수 없었다.
술탄을 보좌하는 지배계급은 직능에 따라 세 가지로 구분되었다. 첫 번째는 '펜을 가진 사람들'인 '칼레미예(문관)', 두 번째는 '칼을 가진 사람'인 '세이피예(무관)', 세 번째는 '지식과 학문의 사람'인 '일리미예(종교학자)'가 있었다. 오스만 슬롯에서 지배계층인 이들은 각각 별도의 관복과 관모를 착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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