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 지옥을 탈출한 여자
작가가 되면. 1000만 원 계약금을 받으면.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바뀔 줄 알았다. 구체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뭔가 인생이 더 화려해질 것 같았다.
그건 베스트셀러 작가의 이야기지. 지금 막 등단한 신인 작가는... 큰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난 아침 일찍 일어나 지옥철에 끼여 출근하고. 업무하다 실수하면 상사한테 혼나고. 7일 중 5일은 샐러드만 먹었고. 서도준씨와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살았다. 변화가 있다면, 경제적으로 약간의 여유가 생겨서 통장 잔액을 예전처럼 확인하지 않을 뿐. 큰 변화는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 마감해야 하는 글이 있었기 때문에. 난 체력 관리에 더 신경을 썼다. 바쁜 와중에도 필라테스를 일주일에 2번 꼭 갔고. 음식도 간이 강하지 않는 걸로. 최대한 심플하게 먹었다. 이혼 이후 트라우마로 몸이 예민해진 만큼 다른 자극을 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인간관계도 깔끔해졌다. 더 이상 애매한 관계를 유지할 시간도. 힘도 없어졌다. 누군가는 내가 변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상황이 변한 만큼. 나도 그에 맞춰 달라졌다. 모든 관계에는 유효기간이 있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바카라이 정식으로 출간되기 전. 난 출판사 관계자와 이야기를 나눴다.
파주 출판 단지에 있는 한 카페에서 만난 그녀는. 맑은 인상과 밝은 미소로 나를 맞아줬다. 카페에는 코를 마비시키는 빵 냄새와 커피향이 은은하게 났다.
“이혼 이후의 삶은 어떤가요?”
이혼 이후의 삶이라... 난 솔직히 지옥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처음엔 행복했다. 적어도 더 이상 불안에 떨며 살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큰일을 겪고 이혼했기 때문에 몇 달 동안의 불면증과 우울감에 시달렸고.
그 사람을 선택해 결혼함으로써.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까지 겪었다는 사실에. 오랜 시간 자바카라했다. 스스로 용서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내 곁을 떠났고. 몇몇 사람만 남았다. 크게 파도치듯. 많은 것이 변했다.
“예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된 것 같아요. 이혼하기 전에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눈치도 많이 보고. 행복해 보이기 위해 노력했는데. 죽을뻔한 위기를 겪으니까 그러기 싫더라고요. 그래서 남들 눈치 보지 말고 하고 싶은 거 다해보려고 노력해요.”
죽음의 문턱 앞에 섰을 때. 남들의 눈높이에 맞추느라 애썼던... 많은 시간들을 후회했다. 원래 남들만큼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그렇게 해서 내가 얻고 싶은 게 뭐였을까라는 든 순간부터. 난 달라졌다.
“이혼이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 같네요. 확실한 건 이혼 후 더 행복해진 거죠?”
난 사실 더 행복해지려고 이혼한 게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이혼한 건데.
오히려 이혼 후 행복해져야 한다는 강박을 버렸다. 마음이 편안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곁에 있는 사람들과 잘 지내면. 그것 자체로 만족스러웠다.
“확실한 건 마음이 더 편해진 것 같아요. 큰 이벤트는 없지만 잔잔한 일상도 감사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다는 걸 배우고 있어요.”
이혼 후 감각이 더 예민해져서인지. 사소한 것들도 크게 와닿았다.
꽃이 피기 전에 맡을 수 있는 달콤한 봄바람이 좋았고. 여름에만 볼 수 있는 초록색 배경도 좋았고. 가을에 빨갛게 노랗게 물든 낙엽을 구경하는 것도 소소한 재미가 있었고. 겨울에 소복소복 쌓인 눈을 밟는 것도. 행복했다.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내 이야기를 경청하며.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이 평화로운 카페의 분위기와. 안정감 있는 그녀의 표정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뜻한 캐모마일차를 한 잔 들이키며. 여유로움을 즐겼다.
“빛나씨, 조심스러운 질문이지만 이혼 후유증은 없나요?”
이혼 후유증은... 새로운 사람을 사귀기가 어려워졌다. 분위기와 말투. 그리고 언어에 대해 지나치게 예민해졌다. 예전에는 마음 가는 대로. 느낌대로. 행동했는데.
이제는 분석했다. 가까이 지내면 위험할지 아닐지... 더 이상 누군가를 순수한 눈으로 볼 수 없게 됐다.
누군가를 함부로 평가할 수 없었지만. 나와 결이 안 맞는 사람인 것 같으면 일단 몸이 거부했다. 거부감이 들면 바로 피했다.
트라우마로 인한 방어기제였다. 그렇게 해서라도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지키고 싶었나 보다.
예전에는 허용되었던 것이 이제는 안 됐다. 기준이 엄격해졌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싶다는 생각이 없어진 것 같아요. 누군가를 잘못 사귀었을 때 리스크가 얼마나 큰지 경험해서... 위험한 상황에 스스로를 노출 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해서 인간관계가 한 번 싹 정리되니 인생이 쾌적해졌다. 예전에는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많이 했던 것 같은데. 더 이상 그런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마음에 단단한 벽이 생겼다. 이혼 과정을 거치면서 떠난 많은 인연 덕분에. 삶이 한층 더 수월해졌다.
누군가와의 만남이 부담스러워진 어느 순간부터. 난 그런 생각을 했다. 살면서 많은 친구가 필요한 게 아니구나. 많은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제대로 된 사람 몇 명만 있으면 되구나. 큰일을 겪으면서 삶의 진리를 자연스럽게 깨우쳤다.
“앞으로 삶의 목표나 방향성이 있을까요?”
삶의 목표는 딱히 없다. 폭언과 가스라이팅에 무방비하게 고통받던 시절을 지나. 여기까지 왔다. 이제는 그런 사람들과 엮이지 않는 것이 내 유일한 목표다. 이제 더 이상. 1분 1초도. 그런 사람들과 엮여 영혼을 더럽히고 싶지 않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제 인생의 목표는... 이상한 사람들과 엮이지 않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