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날, 무 인시그니스 센터 피스

by에코바바


‘꽃의 날’이라 이름 지은 날이 있다. 한 달에 한 번 주제를 가지고 새로운 식물 조합을 해보는 날이다. 보통은 꽃 시장표 식물이 재료이지만 이날은 텃밭 작물을 활용한 창작이 테마였다. 재료 마련을 위해 아침 일찍 텃밭으로 향한다.


이슬이 내린 이른 아침의 밭에선 촉촉한 흙냄새가 올라왔다. 어떤 식물이 재료가 될는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터벅터벅 텃밭으로 향하는 길, 산기슭 낮은 곳에 앙증맞게 작은 3장의 잎줄기들이 어긋나 자라 있다. 이슬 젖은 모습이 꼭 목욕 직후의 모습 같다. 줄기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니 뱀딸기가 주르륵 딸려온다. 나는 뱀딸기 줄기를 바구니에 담고 두 번째 재료를 찾아 텃밭으로 향했다. 가까워지는 텃밭 너머 노란 꽃이 보인다. 반가운 쑥갓꽃이다.


내 텃밭은 채소의 꽃대가 올라올 무렵부터 이웃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이웃들은 꽃줄기가 올라와 꽃을 피우려 절정에 이르도록, 그 줄기를 꺾지 않는 게으른 주인을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들이다. 잎채소는 꽃대가 올라오면 잎채소로서의 기능을 다하는 것인데도 가만히 두니 말이다. 꽃대가 올라오자 커지는 내 기대와는 반대로 이웃들의 염려는 깊어 갔다.


시골로 귀촌하면, 순지르기하지 않거나 제때 뜯어 가지 않은 채소를 보며 이웃들은 꼭 한 소리 한다는데, 내 주변 점잖은 텃밭 주인장들은 말을 아끼는 쪽으로 정한 듯 조용했다. 초보 농부의 기대를 깨지 않으려는 고마운 침묵 속에서 텃밭의 시간도 여물어갔다.




텃밭은 참 재미난 곳이다. 물바다가 되거나 바람이 강하게 분 날이면 두둑이 무너질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나가보면 심지 않은 씨앗들이 내 텃밭에 바람을 타고 이사를 와 있다. 그러면 자연, ‘상추는 2포기만 심었어도 됐을걸…’하는 후회를 하며 두둑을 재정비한다.


정원 텃밭을 가꾼다는 것은 지렁이의 분변토를 귀한 광물로 여기고, 귀엽던 달팽이까지도 척질 각오를 하겠다는 선언도 포함한다. 어느 날 잎을 들추면 커다란 달팽이들이 오글오글 반상회 하듯 모여 있는데, 귀엽기만 했던 달팽이들을 보며 그만 “회합이라니!” 외치고 즉시 ‘헤쳐 모여’를 명한다. 이후 사유지에서의 회동을 일절 금한다.


텃밭을 시작할 때 생각지 못한 저항군도 있다. 그들은 모두 작은 밭이라도 가꾸는 이들로, 농사의 고단함에 애초에 시작부터 반대해 볼 요량으로 여러 말을 한다. ‘적은 식솔의 비룟값이 더 드네’, ‘농사는 시작과 동시에 자유는 반납’이라며 저마다의 경험담을 쏟아낸다. 그러다 밭 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하면, 언제 만류했었냐는 듯이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이들의 조언은 대충 이런 것이다. 이웃과의 평화를 위한 박과 식물들, 호박이나 오이가 넘어가지 않도록 단도리를 잘해야 한다는 것, 밭은 반드시 물 대기 좋은 곳이어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다. 경계 없는 식물이 쉬이 침범하지 않도록 특별히 관리해야 한다는 말을 강조했다. 나는 그들의 기우를 무력 시키고자, 텃밭에서 뻗어 나가는 식물의 자리를 잡아주는 일을 앞순위로 했다. 무뢰한 같은 텃밭 이웃이 되지 않기 위해.


텃밭을 가꾸지 않는 이들의 관심은 결이 달랐다. “암 환자들이 반드시 키우는 작물이 가지이다.”, “눈에 좋은 루테인이 많이 든 메리골드를 키우는 게 좋겠다.”, “키워서 먹는 딸기가 제맛”이라며 심었으면 좋겠는 작물들을 줄줄이 열거했다. 또 나의 긴 휴가에는 텃밭에 물을 대러 오겠다거나, 불쑥 올라오는 잡초를 뽑아주러 오겠다는 둥 들어보면 농사를 짓겠다는 심산이다. 그들은 심은 작물의 열매가 잘 맺혔는지, 달린 열매들은 어떤 게 있는지 등 세심한 관심을 내보였다.


더위로 잔뜩 독이 오른 지글지글한 땅인데도, 먼 길을 달려와 쭈그려 앉아 잡초를 뽑고 물을 주겠다는 지인들이었다. 그 뜨거운 모습을 보며, 역시 그들 몸속에 숨어 있던 농사꾼의 인자가 더는 본색을 감추지 못하고 터져 나오는 외침처럼 느껴졌다. 한국 사람은 해외에 나가서도 작은 밭뙈기 한 뼘만 보이면 무엇이든 심었다는 미국 이민 1세대처럼, 우리 모두에게는 농사꾼의 기질이 흐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인들은 벌써 가뭄 걱정, 홍수 걱정까지 미리 사서 하며, 하늘을 향해 기우제와 기청제라도 함께 지내줄 기세다.




텃밭의 시간이 무르익으며 우리 집 텃밭은 밀원식물 맛집이 되었다. 텃밭에 쏟아지던 시선과는 별개로 꽃등에와 벌, 나비들이 부지런히 날아들었다. 적겨자의 꽃은 유채와 꼭 같았다. 급기야 쑥갓꽃이 얼굴을 내밀자, 마뜩잖은 표정들도 사라졌다. ‘저 텃밭은 저렇게 흘러가는구나’ 하며 어쩌면 체념하고 결과를 받아들이는 시간일 수도 있었다. 꽃이 하나둘 피어나자, 이웃들은 꽃을 보려 둘러 가곤 했다. ‘무해한 꽃을 싫어할 순 없지.’ 하고 꽃 부심을 부려본다. 그간 사연 많던 쑥갓꽃과 무 열매를 꺾어 집으로 돌아왔다.


텃밭에서 거둔 무 열매와 우리 집 화분에서 자라는 중앙아메리카 태생의 칼라데아 인시그니스. 이 둘의 화려한 콜라보로 불꽃을 닮은 센터 피스를 만든다. 덩달아 따라온 노오란 쑥갓 꽃과 빛나는 뱀딸기도 이 콜라보의 감초 역할을 한다. 무 인시그니스 센터 피스에는 모든 순간이 불꽃처럼 아름답다는 마음을 담아본다.



이전 02화또 다른 세계로 떠나는, 호박 마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