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세계로 떠나는, 호박 마차

by에코바바


가장 특별한 작물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호박이다. 호박에는 내 유년의 온기가 묻어 있다. 호박은 겨울날 따뜻한 방 아랫목에서 까먹던 호박씨를 떠올리게 한다. 장판 밑에 숨겨두었던 호박씨를 꺼내 하나씩 까먹던 정겨운 시절이었다. 여름날에는 외갓집 담벼락을 푸르게 뒤덮은 호박 넝쿨 사이로 주렁주렁 열린 호박들이 늘 풍요로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여자 사촌들만 모이는 방학이면, 막내 이모도 친히 시골집을 찾아와 주었다. 점심때가 되어 이모가 "얘들아, 호박 하나 따 오너라!" 하면, 아이들은 재잘거리다 우르르 달려 나갔다. 까르르 웃음소리와 함께 호박과 호박 잎을 한가득 따 오던 나날이었다. 그렇게 따 온 호박을 외할머니표 된장에 썰어 넣고 보글보글 끓여내면 다 같이 둘러앉아 나눠 먹었다. 시끌벅적하고 따스한 시간. 그래서 내 영혼의 음식은 늘 호박을 듬뿍 넣은 된장찌개였고, 언젠가 내 손으로 꼭 한번 길러보고 싶은 작물이었다.




텃밭을 가꾸고, 봄부터 여름내 조용히 덩굴을 뻗어가는 호박을 바라보는 일은 내 텃밭 생활의 특별한 즐거움이었다. 특히 호박의 재식 간격은 다른 작물보다 넓게 자리 잡아주고, 덩굴손이 엉뚱한 방향으로 뻗어 나갈 때면 방향을 바로 잡아주었다.


호박잎은 사람 얼굴보다 큰 우산처럼 널따랗게 땅을 덮으며 자라났다. 스스로 그늘을 만들어 땅의 수분이 증발하는 걸 막으면서 자랐다. 덕분에 잡초가 자라지 못하게 하며 스스로 제 터전을 지켰다. 참 멋진 식물이었다. 손을 내밀어 무언가를 잡는 호박의 덩굴손이 허공을 휘젓다가도, 잡을 게 걸리면 스프링처럼 동그랗게 감아쥐며 몸을 지탱하는 모습도 신비로웠다. 어디든 뻗어 나가 무너지지 않으려는 강인한 생존 의지를 지닌 것처럼 보였다.


여름 내내 커다란 잎사귀 뒤에 숨어 있던 작았던 호박은 가을이 되어 잎이 시들자, 비로소 묵직하고 단단한 주황빛 자태를 드러냈다.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홀로 내실을 다지고 뽀오얀 분을 묻힌 채 나타난 것이다. 잎 그늘에 숨어 초록에서 점차 묵직하고 따스한 주황빛으로 익어가던 늙은 호박은, 가을이 깊어질수록 나에게 커다란 수확의 설렘을 주었다. 호박이 하나둘 열리고 어린 호박들을 따낼 때마다, 늙은 호박 하나가 익어가는 모습을 가만히 살피곤 했다. 그것은 내가 흘린 땀만큼이나 깊고 벅찬 기쁨이었다.


수확 날, 탐스럽게 익은 호박을 생각하며 밭으로 나섰다. 어린 시절 사촌들과 외갓집 마당 담벼락에 호박을 따러 나가던 그때처럼 풍요로움이 차올랐다. 어릴적처럼 호박을 크게 키워 호박죽을 만들어 먹고, 호박씨를 바삭하게 말려 다시 한번 까먹는 상상을 한다.


그랬는데 밭에 가보니 여름내 땀 흘려 가꾼, 기다려온 호박이 없다. 누군가 베어가 버렸다.


…


텅 빈 마음을 메울 수 없어 한동안 밭에 앉아 있다가,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에 가는 길에 들른 로컬푸드 매대에는 잘 익은 호박들이 한가득 쌓여 있다. 비록 내 호박은 아니지만, 호박이 너무 예쁘다… 그러다 어여쁜 호박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예쁜 호박을 품에 안고 집에 돌아왔다.


나쁜 기억에 내 마음을 오래 빼앗기고 싶지는 않았지만 허무하고 힘든 마음을 누르는 방법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다른 좋은 상상이 필요했다. 그때 다시 호박이 보였다.


'그래! 너를 아름다운 호박 마차로 만들어 줄게.'


호박 주변으로 예쁜 상상들을 채워 넣으며, 잃어버린 결실에 대한 상실감을 손끝으로 달래기로 했다.




또 다른 세계로 떠나는 호박마차


솟아오른 세로결의 지붕 장식을 호박마차 꼭지로 얹고, 단단하고 우아한 곡선 안에 가을 수확의 화려한 축제를 펼쳐 보인다. 알알이 맺힌 팥배나무 열매, 강렬한 존재감의 다알리아, 푸른빛의 세이지와 천일홍, 귀여운 미니 수박, 매콤한 고추, 그리고 탐스러운 국화와 동글동글한 폼폰 국화 친구들과 함께.


가을을 대표하는 호박은 다채로운 식물들의 호위를 받으며, 마침내 할로윈 파티의 주인공이자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호박마차'로 거듭난다. 일상을 벗어나 또 다른 세계에 도착해 눈이 부시도록 즐겁고 경이로운 세상을 경험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