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오너먼트, 땅콩 트리

by에코바바






겨울이 오면 집안을 빛나는 오너먼트로 장식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멋진 선물이 주렁주렁 매달린 크리스마스트리를 떠올리는 건 매년 크리스마스에 단골로 틀어주었던 맥컬리 컬킨 주연의 영화 ‘나 홀로 집에’ 때문일까? 짓궂은 사촌들 틈에서 벌어지는 황당한 소동과 혼자 남겨진 소년의 뜻밖의 분투기는 크리스마스가 선물하는 기적 같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꽃시장 한구석에서 풍선 박주가리를 발견했다. 평소라면 보기 힘들었을 소재라 그런지 괜히 반갑다. 풍선 박주가리를 보니 오래전 식물 재배학 수업을 들었던 그날이 떠오른다. 한창 선생님의 설명을 듣던 중 친구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던 그날.


강의실 안의 친구들이 웃는 동안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제 박자에 맞춰 웃지 못하는 내 모습을 지켜보던 동기가 슬그머니 노트 위에 ‘Couille de pape’라는 글자를 적어주었다. 낯선 이국땅에 온 외국인 유학생 친구를 향한 학우의 배려였다.사전을 찾아본 나는 시간차를 두고 그제야 웃었다. 직역하면 '교황의 방울'이라는 뜻의 민망한 현지 속어였다. 동글동글 크게 부푼 열매에 거친 털이 숭숭 난 모습이 꼭 그걸 닮았다고 해서 붙인 프랑스인들의 짓궂은 비유다. 성스럽고 고결한 '교황'이라는 단어 뒤에 이런 반전 매력의 수식어라니.


식물 재배학 수업은 일주일에 두 번, 본 수업이 시작되기 전인 이른 아침 화훼 유통 직판장 ‘오르티카시(Horticash)’에서 열렸다. 그곳에서 우리는 식물을 동정하고 라틴어 종·속명인 학명과 프랑스어 일반명, 시장 유통명 등의 시험을 쳤다. 점잖은 표현만 쓰고 싶어도 졸업 후 바로 현장에 나갈 제자들을 위해 선생님은 유통 은어와 시장 명, 민간 속명까지 모두 가르쳤다. 그야말로 새벽공기를 가르며 시작하는 실전형 수업이었다.



그 시절의 새벽 공기를 떠올리며, 신문지에 돌돌 말려 있던 풍선박주가리의 포장을 벗겨낸다. 동글동글하게 부풀어 오른 녀석들을 엮어 작은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든다. 그 위로 정성껏 수확했던 땅콩들도 오너먼트처럼 조심스레 얹어본다.


생각해 보면, 땅콩이 좋아서 농사를 지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잘록한 화병 두 개를 맞댄 듯한 기이하고도 귀여운 생김새가 참으로 매력적이어서 길러보고 싶었다. 개인 밭에는 네 포기를 심고, 농업기술센터 공동 텃밭에는 긴 두둑을 만들어 팀별로 나누어 경작했다.


땅콩을 밭에 심던 날, 작은 호기심도 하나 싹트고 있었는데,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허리 잘록한 발레리나의 인터뷰를 보았던 기억 때문이었다. 통밀 식빵 한 장에 두툼하게 바른 땅콩잼을 먹으며, 이것만으로도 하루 끼니가 되어 든든하다고 했다. 나는 땅콩의 효능감에 놀라워하면서도 한편으론 고개를 갸우뚱했다. 찾아보니 땅콩은 지질, 단백질, 탄수화물 등과 무기질, 비타민을 풍부하게 함유하고 기억력 증진과 콜레스테롤 감소, 동맥경화 예방 등에도 도움을 주는 대단한 작물이었다.


땅콩은 꽃이 필 때에 웃거름을 한번 주고, 특별한 관리를 해주지 않아도 신기하게 혼자서 잘 자랐다. 그렇지만 꽃이 질 때는 일명 북주기로 꼭 관심을 기울여줘야 하는 아이였다. 땅콩에는 꽃이 지고 나면 씨방자루가 땅속으로 파고들어 열매를 맺는다는 뜻의 ‘낙화생(落花生)’이라는 별명이 있다. 노란 꽃이 진 자리에 밑씨를 품은 자방병(씨방자루)이 길게 자라나, 땅 아래에서 땅콩을 맺는 원리다. 당시 도시농업 선생님은 꼭 유치원 선생님처럼 생태 퀴즈를 내곤 하셨는데,


“꽃줄기가 내려가서 땅콩이 맺혀야 하는데 비닐이 덮여 있으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물으면, 우리는 일순 유치원생들처럼


“안 돼요!” 대답하고, 약속이나 한 듯이 검은 멀칭 비닐을 북북 찢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곧이어,

“잘 자라면 100개도 달려요” 하고 독려도 해 주셨다.


‘주렁주렁 100개도 달린다니…’ 모종 값을 생각하면 실로 놀라웠다. 우리는 비닐을 걷어내고 드러난 흙 위로 땅콩잎을 방사형으로 펼쳐 놓고, 다시 흙을 덮어 노란 꽃이 땅에 닿게 해 주었다.


‘땅콩아, 열려라 열려라~’ 고대하며.

마치 고사를 지내듯이 정성을 쏟았다.




가을이 무르익어갈 무렵, 땅콩을 수확하러 먼저 도착한 조장님이 팀원들을 부른다.


“아이고, 여기 좀 봐요! 맛있는 건 동물들이 먼저 안다니까. 서생원(鼠生員)께서 벌써 다녀가셨네. 어찌 알고 이리도 빨리 다녀가셨는지.”


남의 곡식을 갉아 먹는 탐관오리를 쥐에 빗댄 해학적인 표현이었다. 어쨌든 쥐가 먼저 손을 댔다는 건 이제 맛볼 때가 됐을 만큼 잘 익었다는 뜻일테니, 그저 좋은 곳에 보시했다 셈 치고 기분 좋게 수확을 시작한다. 부드러운 흙 위로 땅콩 잎 한 움큼을 잡아 살살 당기니 잎보다 거대한 땅콩이 줄줄이 딸려 나왔다. 실로 수확의 계절다운 가을 수확이었다.


겨울 녘, 농사지은 땅콩과 풍선 박주가리, 하늘 고추, 노란 난, 레드베리, 이반호프와 함께 땅콩 트리를 거실에 세운다. 화려한 불빛과 특별한 오너먼트 없이도 12월 우리 집을 환하게 밝혀준다. 앙증맞은 작물과 밝은 에너지를 주는 작은 식물들이 땅콩 트리가 되어 따뜻이 거실을 밝혀주는 겨울이다. 크리스마스 오너먼트가 반짝이는 순간, 가족의 사랑도 함께 반짝이는 것 같다.



* 본 에세이는 낯선 라틴어 학명 대신, 일상에서 친숙하게 쓰이는 유통명과 대중적인 표기를 우선하여 사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