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슈가 사전- 기쁨어 편
국면局面
어떤 일이 벌어진 장면이나 형편.
바둑이나 장기에서 반면의 형세를 이르는 말.
내가 알던 국면이라는 뜻도 다르지 않았다.
우리 회사, 우리 부서는 어떤 국면에 처할 것인가.
나는 지금 어떤 국면에 처해 있는가.
그런데, 그날 이후로 국면이라는 단어는 나에게로 와서 다른 뜻이 되었다. 국면은 그날 이후 나에게 기쁨어가 된 것이다.
"혜숙아...? 듣고 있어?"
"... 네에, 언니..."
언니는 내가 첫 회사에서 만난 사람이다. 첫 회사 옆팀의 팀장이었다. 그리고 몇 주 지난 뒤 회식 자리에서 나는 알게 되었다. 언니가 우리 학교 선배라는 것을. 그때 나는 예감했다. 이 분과 오래도록 소식을 전하는 사이가 될 것 같다고.
그때 선배 언니에게 우리 집 사정을 얼마나 자세히 얘기했는지 기억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말은 했던 것 같다. 결혼 생활 20년 만에 처음이라고. 이렇게 총체적으로 힘든 시기는. 이런 시기는 조용히, 무리하게 일을 벌이지 않고 지나가야 하는 거냐고 묻고 싶다고. 그런데 누구를 붙잡고 물어야 하는지는 모르겠다고.
"혜숙아, 잘 들어. 그런 시기는 살면서 한 번씩 와. 한 번이 뭐야? 여러 차례 올 수도 있어. 어떤 때는 쓰나미처럼 한번 오면 물러가겠지 하는데 또 와, 파도처럼 폭풍처럼 계속해서 밀고 들어와. 그럴 때는 답이 없어. 그냥 통과해야 하는 거야."
"..."
"그런데 혜숙아. 그러다 아주 작은 일 하나가 '국면'을 바꾸기도 해. 작은 일 하나가 잘 풀리잖아? 그러면 안 풀리던 다른 일들이 하나 둘 풀리기 시작하더라. 그 신호를 잘 알아차려야 해."
"국면... 이요?"
"응. 지금도 오고 있을지 몰라. 명심해. 그리고 신랑에게 많이 웃어줘. 그렇지 않더라도 고맙다고 더 자주 말해줘."
"언니..."
전화를 끊자 며칠 동안 기승이던 두통이 가라앉는 듯했다. 마음 한 구석을 차지했던 먹구름도 그것보다 더 강한 해가 들이 닥쳐서인지 자리를 내주고 힘없이 물러났다.
국면이라... 국면이라는 단어를 소리 내 읽는다. 그리고 찾기 시작했다. 국면을 전환시켜 줄 작은 신호가 무엇인지.
남편 욕실의 칫솔을 새 칫솔로 바꾼다. 두루마리 휴지도 새것으로 괜히 갈아 놓는다. 면도날이 닳지는 않았는지 살펴본다.
베란다로 나가 언젠가 사둔 영양제를 칙칙 뿌려본다. 5초도 안 지났는데 초록이 짙어 보이는 건 흔한 착각일까. 갑자기 서랍을 열어 구멍이 났거나 뒤꿈치가 닳은 양말을 모조리 골라내 쓰레기봉투에 담는다. 온 방의 베갯잇을 벗겨 손으로 초벌 빨래하고 세탁기에 넣었다.
한 시간도 안 지났는데 집이 반짝반짝 빛이 난다.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았다. 그 신호는 이미 와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단어, '국면'을 내 기쁨어 사전에 추가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