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형광펜 치는 연습
"그럼 지하철역에 내려줄게. 내가 조금 서둘면 되지 뭐"
"그래주면 고맙지"
퇴사 후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일을 안 했냐면 그건 아니다. 자영업자로, 강사로, 코치로, 작가로 촘촘히 보냈다. 회사만 안 다녔을 뿐이지.
그런데, 남편이 사업을 시작하면서 내가 하던 일에 역할 하나를 더 추가해야 했다. 그 일을 맡기 위해서는 2주간 종일 교육을 이수해야 했다. 교육장은 집에서 1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9시까지 교육장에 도착하려면 7시 반에는 집에서 나서야 했다. 그것도 집안을 깔끔히 정리하고 나서. 무언가를 생각하던 남편이 꺼낸 아이디어는 이것이었다.
고맙다고 말하기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교육을 받는 중에도 내가 원래 하던 본업들은 차질 없이 돌아가야 했다. 원고 작업, 글쓰기 코칭, 글쓰기 모임 운영, 남편의 일 블로그 운영 등. 머릿속은 이사 후 채 정리하지 못해 방치된 이삿짐 박스처럼 어지러웠다.
첫 카풀 출근하는 날은 월요일이었고 더웠다. 날씨는 이미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기세 등등했다. 작은 비조차 내리지 않아 바짝 마른 대지는 아침부터 타 들어가는 중이었다.
10여 년 만에 회사, 그것도 대기업에 속하는 그곳에 교육을 받으러 출근하려니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 막막했다. 예뻐 보이는데 치중해야 할까? 아니면 폭염을 견디는 실용성에 무게를 둬야 하나? 저울질하다 고른 옷은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차림새였다. 남편이 차를 빼고 주차장에서 기다렸다. 조수석에 타는 내 표정이 어두웠나 보다.
"뭐 놓고 왔어?"
"... 아니."
뭐라도 놓고 왔다고 하고 다시 올라갔다 오고 싶은 마음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옷도 화장도, 출근도, 죄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래서 기분이 정말 별로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남편은 이런 나의 넋두리를 받아주는 스타일이 아니다. 하고 싶은 말들을 가득 물어 볼은 빵빵해졌는데 차는 그런 건 아랑곳없다는 듯 주차장을 유유히 빠져나와 도로에 안착했다.
월요일 아침 도로는 생각보다 한산했다. 가까운 지하철역에 내려주기로 했던 남편은 도로 사정을 보더니 한 정거장 더 가서 내리는 게 좋겠다고 했다.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들이 기세 좋은 여름 햇살에 산산이 부서지는 느낌을 받았다. 더 정확하게는 축축했던 마음이 햇살에 바싹 말라 쾌적해진 느낌. 점입가경으로 우리는 손을 잡고 있었다. 누가 먼저 잡았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이런 출근길도 괜찮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평소 표현을 잘 안 하는 남편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주바카라맞은 착각도 들었다. 그때였다. 입가에 뜻을 알 수 없는 주문이 중얼중얼 또 흘러나왔다.
왜, 언제부터인지 이 말을 시작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모든 게 짜증 나고 힘에 부치는 순간에도 "뤠쎄써레~" 하고 말도 안 되는 이 주문을 읊조리고 나면 신기하게도 상황이 괜찮아지곤 했다. 풉 웃음이 나왔다. 어원도 모르는 이 단어 조합을 왜 중얼거리는 건지, 중얼거리고 나면 왜 이리 마음이 편안해지는 건지.
이유 따위 몰라도 상관없었다. 분명한 건 내 기분의 각도가 360도 바뀐다는 사실이니까. 기억해 두기로 했다. 평범하고 지루해서 진저리 나는 순간을 나만의 선명한 하이라이트(절정)로 만들고 싶다면 이 주문을 읊조리자고.
그래, 이 말도 안 되는 중얼거림은 하이라이트의 입구로 들어가는 주문이었다. 하이라이트 시간을 기필코 찾아내겠다는 의지의 주문이기도 했다.
열정으로 촘촘히 버티다가도 힘 빠지는 오후가 되면 ‘너는 보잘것 없는 존재야‘라는 누군가의 윽박지름이 들리는게 인생이다. 그런 윽박지름도 단숨에 걷어내 버리는 강력한 주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