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저에게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운 좋게 서울의 대학에 진학했고, 졸업 후에는 좋은 온라인 게임에도 들어갔습니다. 지금의 아내를 만난 것도 서울이었고, 아이가 태어난 곳도 서울이었습니다. 제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은 대부분 서울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연히 서울에서 늙어갈 줄 알았습니다. 평생 서울에 살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아파트 매수자가 나타났다는 연락을 받은 뒤 저는 인생에서 가장 큰 선택 앞에 서게 됐습니다. 가족도 찬성했습니다. 동료들도 찬성했습니다. 숫자로 계산해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가 그토록 원하던 파이어에 가장 가까워지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부동산과 약속한 일주일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밤마다 뒤척였습니다. 머릿속에서는 같은 질문이 반복됐습니다.
'정말 서울을 떠나도 될까?'
'혹시 사업이 잘못되면?'
'파이어 이후의 삶이 생각했던 것과 다르면?'
'괜히 인생을 망치는 건 아닐까?'
계속 생각했습니다. 생각할수록 더 결정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속 깊은 지인을 만났습니다. 술 한잔을 앞에 두고 그동안의 고민을 털어놨습니다. 한참 이야기를 듣던 지인이 물었습니다.
"근데 넌 왜 이렇게 고민하는 거야? 사업 때문이야?"
"그것도 있고"
"돈 때문이야?"
"그것도 조금"
지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습니다.
"내가 보기엔 그게 아닌 것 같은데"
"뭐가?"
"솔직히 말해봐"
"응?"
"서울에서 밀려나는 기분 드는 거 아니냐?"
"......"
"너 부산에서 서울 올라와서 성공했다고 생각하며 살았잖아"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지인은 말을 이어갔습니다.
"혹시 남들 시선이 신경 쓰이는 거 아니야?"
솔직히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부산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자리 잡았는데 이제 와서 다시 부산으로 내려간다고 하면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밀려났나?'
'사업이 안 되나?'
'왜 굳이 지방으로 가지?'
저도 모르게 그런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지인이 다시 물었습니다.
"근데 너 파이어 왜 하려고 했는데?"
"가족 때문이지"
대답을 하다가 문득 멈췄습니다. 가족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정작 저는 가족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사업이 잘될지, 내 커리어는 어떻게 될지 그리고 파이어 이후 수익은 어떻게 만들지 등등 온통 그런 이야기뿐이었습니다. 정작 가장 중요한 질문은 하지 않았습니다.
가족이 행복할까?
그날 집으로 돌아와 처음으로 계산기를 내려놓았습니다. 대신 종이를 한 장 꺼냈습니다. 그리고 부산으로 가면 달라질 것들을 적기 시작했습니다.
아침마다 아이 유치원 등원을 함께할 수 있다.
평일 낮에 아내와 산바카라할 수 있다.
아이가 아플 때 바로 달려갈 수 있다.
부모님을 더 자주 볼 수 있다.
동생 가족과 같은 아파트에서 지내며 서로 의지할 수 있다.
아이도 사촌과 함께 자랄 수 있다.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반대로 최악의 상황도 적어봤습니다.
사업이 망한다.
파이어 계획이 틀어진다.
수입이 크게 줄어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계산이 끝나고 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습니다. 최악의 상황이 와도 가족이 굶지는 않았습니다. 자산을 일부 잃더라도 제가 최저시급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생활 자체가 무너질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니 저는 파산을 두려워한 게 아니었습니다. 남들이 실패했다고 생각할까 봐 두려웠습니다.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가족의 행복을 위한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며칠 뒤 동료들을 다시 만났습니다. 저는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나 결정했어"
다들 저를 바라봤습니다.
"부산 내려갈게"
잠깐 정적이 흘렀다가 B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잘 생각했다"
A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어차피 할 거면 빨리 하는 게 낫지"
저는 말을 이었습니다.
"대신 부산 매장 오픈은 내가 바카라임질게"
"좋지"
"온라인 판매도 계속 맡고 서울 올라와야 하면 언제든 올라올 거야"
생각보다 훨씬 담담한 회의였습니다. 반대도 없었고 만류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모두가 이미 마음의 준비를 끝낸 사람들 같았습니다.
그날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결정했어"
아내는 웃으며 물었습니다.
"후회 안 하겠어?"
"그래도 해보려고"
부모님께도 전화를 드렸습니다.
"결정했으면 됐다. 이제 자주 보겠네"
다음 날 부동산에 전화했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사장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결정하셨습니까?"
저는 짧게 대답했습니다.
"네. 계약 진행할게요"
잠이 오지 않아 베란다에 나가 서울 야경을 한참 바라봤습니다.
갓 스무 살 아무것도 없던 제가 처음 올라왔던 도시.
첫 월급을 받았던 도시.
아내를 만난 도시.
아이가 태어난 도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서울을 떠나는 게 아니라 서울이 나를 키워준 거였구나'
이상하게도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떠나는 것이 실패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충분히 감사했고, 이제는 다음 페이지를 넘길 때가 된 것 같았습니다.
결국 제가 떠난 것은 서울이 아니었습니다. 남들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박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