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단계. 파이어를 반대하고 있던 건 나였다

by지크


부모님도 좋다고 했고, 아내도 적극 찬성했고, 숫자로만 계산하면 부산 이사는 제가 그토록 바라던 파이어에 가장 가까워지는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서울을 떠나는 문제였고, 지금까지 함께 회사를 키워온 동료들의 미래가 걸린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동료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예상이 되지 않았고 불편함 때문인지 전날 악몽도 꾸었습니다.


"나 부산으로 가야 할 것 같아"


"그럼 사업은?"


"..."


"우리 보고 알아서 하라는 거야?"


"..."


"그럴 거면 진작 말하지. 같이 시작도 안 했을 텐데"


"너 하나 잘되자고 사업을 망쳐버리네"


새벽에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예전에 다른 동료를 이렇게 떠나보낸 적이 있었기에 이번에 이러지 말라는 법도 없었습니다.


동료들을 만난 날 저는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습니다.


"집이 팔릴 것 같아"


처음에는 다들 가볍게 들었습니다.


"요즘 불장이라더니 타이밍 좋네"


"솔직히 얼마에 팔았어? 부럽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음 말을 꺼내자 표정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근데 부산 이사를 고민하고 있어"


회의실이 잠깐 조용해졌습니다. 순간 정적이 흘렀습니다. 누군가는 커피를 마셨고 누군가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저는 그 침묵이 더 무서웠습니다. 준비해 온 이야기를 차근차근 꺼냈습니다.


"물론 사업에 차질이 생기면 안 갈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내가 사업에서 물러나는 것도 생각하고 있어"


말을 하고 나니 오히려 제가 더 긴장됐습니다. 사실 속으로는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건 좀 어렵지 않을까?"


"사업이 좀 더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는 건 어려워?"


이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습니다. 회사가 이제 겨우 사람답게 굴러가기 시작한 시점이었으니까요. 그동안 다 같이 고생했습니다. 이제야 조금 먹고살 만해졌는데 동료가 먼 곳으로 내려간다고 하면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반대 의견을 들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A가 갑자기 입을 열었습니다.


"솔직히 좀 당황스럽기는 하네"


예상한 반응이었습니다.


"근데 이거 생각보다 말이 될 것 같은데?"


저는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됐습니다. A는 회사 살림을 전부 맡고 있는 사람입니다. 회계, 총무, 법인 업무, 각종 서류 작업까지 회사의 뒷일은 거의 다 A가 처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A가 노트북을 돌려보며 말했습니다.


"엄연히 따지면 너의 역할이 온라인 판매와 영업인데 생각해 보니까 온라인 판매는 원래 비대면이잖아"


"그렇지"


"영업도 꼭 서울에 있어야 하는 건 아니고"


"그건 그렇지"


"부산이든 하와이든 사는 데가 문제가 아니라 지금처럼 일하다가 꼭 필요할 때 서울에 올 수 있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저는 습관처럼 서울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정작 제가 하는 일 대부분은 인터넷과 전화로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B가 말을 꺼냈습니다. B는 제빵 자격증까지 있는 사람으로 회사의 모든 디저트 생산과 레시피 개발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신제품이 나오면 거의 대부분 B의 손에서 시작됐습니다.


"그럼 오히려 좋은 거 아니야?"


"뭐가?"


"부산에서 가판 프로젝트 제대로 해보자. 어차피 서울에서는 월세가 비싸서 제대로 된 매장을 얻기 어려웠잖아"


사실 저희는 가판 프로젝트의 소소한 성공 이후 정식 매장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번 했었습니다. 문제는 비용이었습니다. 괜찮은 상권은 보증금부터 감당이 안 됐고 월세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부산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B는 신이 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습니다.


"월세도 훨씬 싸고 당연히 서울 대비 좋은 상권에 얻을 수도 있겠지? 1년 테스트 매장 해보기 딱 좋은데?"


중대 발표를 하러 모였는데 갑자기 사업 확장 회의가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분명 저는 회사를 그만둘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건 만류도 아니고 걱정도 아니었습니다. 부산으로 가서 더 크게 해 보자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혼자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혼자서 서울을 떠나면 사업이 흔들릴 거라고 생각했고, 혼자서 회사를 떠나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함께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이미 다른 가능성을 보고 있었습니다.


회의가 끝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부산 이사는 현실성이 없는 상상 같았습니다. 그런데 부모님도 환영했고 아내도 찬성했고 동료들마저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파이어를 위한 퍼즐 조각이 하나씩 맞춰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날 밤늦게까지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이제 남은 사람은 저 하나뿐이었습니다. 결국 제가 넘어서야 했던 건 서울도 아니었고 사업도 아니었습니다.


평생의 절반 이상을 보낸 서울을 떠난다.

왠지 크게 성공해서 귀향하는 건 아닌 느낌이다.

만에 하나 사업이 잘못되었을 경우 대안이 없는 것 같다.


기회가 왔음에도 불안에 가득찬 제 자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