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연애를 시작했습니다

근데 왜 제 심장이 뛰는걸까요?

by피어라

아들이 연애를 시작했다. 중3 작은 아들이 기말고사 1주일 앞두고 같은 반 여자아이와 ‘커플’이 되었다. 지금껏 차이기만 했던 아들에게 여친이 생기다니. 그야말로 ‘세상에 이런 일이’다.


저녁 먹고 늘어져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금요일 7시. 뜬금없이 작은 아이가 옷을 입고 나선다. 친구가 놀자고 불렀다며 다녀오겠다나. 집돌이 중의 집돌이인 녀석이 친구와 논다고 하니 반가운 마음에 어서 나가라고 현관문부터 열어주며 내보냈는데, 10시 30분이 되도록 소식이 없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놀고 온 적이 없었는데, 축구라도 하고 있나, PC방에 갔나, 들어오면 잔소리 좀 해야겠다 생각하는 순간 문 열리는 소리가 나고 아들이 들어온다. 불퉁한 표정으로 아들을 쳐다보는데, 상태가 이상하다. 입꼬리가 씰룩거리고 고개가 막 흔들리며 흐느적거리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웃음을 간신히 참는 표정으로 내 앞에 오더니 여러 번 숨을 고르고는 입을 연다.

“엄마, 나 여친 생겼어.”

아들의 말을 해석하는데 10초 정도 걸린 것 같다. 이어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 여친? 네가? 어머, 어머!”


오늘처럼 순수하고 수줍으면서 벅차오르는 아들을 본 적이 없었다. 그건 내가 모르는 소년의 얼굴이었다. 인생 첫 여친이 생긴 열다섯 소년의 얼굴. 뿌듯함, 충만함, 떨림과 설렘이 온 얼굴에 가득했다. 보는 사람도 행복해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아들이 말했다.

“엄마, 너무 행복해.”

옷도 안 갈아입고 눈을 감은 채 내 침대에 엎어지며 조그맣게 중얼대는 아이의 고백을 듣는데, 너무 설레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말간 얼굴과 평소보다 살짝 들뜬 목소리가 너무 어여뻐서 나도 행복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 어떻게 고백했어, 그 친구의 어떤 점이 좋았어, 그 친구는 네가 어디가 좋다던, 참 이름이 뭐라고?

- 내가 귀엽고 다정하대. 나도 그 친구가 귀여워서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거든. 안 될 거라고 생각해서 마음 접고 있었는데, 먼저 사귀자고 하는 거야……하, 참 이름도 예뻐. 희원이야.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애틋하게 들릴 정도로 소중한 마음이 느껴졌다. 자기들은 안 헤어질 거고, 고등학교도 같은 곳으로 가겠다며 묻지도 않은 얘기를 시시콜콜 늘어놓다가 갑자기 도끼눈을 뜨고서는, ‘이모한테 절대로 말하지 마!’라고 엄포를 놓는다. 첫 사랑 얘기 중에도 남들에게 자기 얘기 하는 거 싫어하는 까칠한 사춘기 모드는 변하지 않는가보다. 그러고는 내일도 만나기로 했다면서 기대에 부푼 얼굴로 씻으러 갔다. 늦었다고 잔소리할 작정이었던 엄마의 혼을 쏙 빼놓고서.


그 밤,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다 잠에 들었을까. 내내 어떤 꿈을 꿨을까.


다음 날 아침, 평소라면 11시가 넘도록 늦잠을 자는 주말인데 작은 아들은 엄마보다 먼저 일어나 바카라상 앞에 앉았다. 저녁에 또 ‘여친’을 만나 산바카라하기로 해서 미리 공부해두겠단다. 어이없어 하는 아빠를 보며 엄마는 아들을 만드는데 30년이 필요하지만 여자는 3분이면 된다는 어딘가의 농담이 절로 떠올랐다. 아침에 공부하고 저녁에 놀라는 잔소리를 1년 내내 해도 들은 척도 안하더니 하룻밤 만에 아들이 변했다. 남편은 배신자라고 삐죽거렸고 엄마아빠는 중고등학생 때는 연애 안했는데, 누구를 닮았는지 모르겠다는 ‘라떼’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대학생 큰애도 자기는 이성에 관심이 없던데 동생은 다르다며 옆에서 한 마디 거들었다. 가족의 반응이 어떻든 작은아이는 신경 쓰지 않고 시계만 쳐다보며 토요일 오후를 보냈다.


저녁까지 기다리는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작은아이의 시간은 엄마의 시간과 다른 속도로 더디게 흘러, 겨우 저녁이 되었다. 여친의 학원 보강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마중 나가기로 했단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안 되냐 물어보니 그건 너무 부끄러워서 못하겠단다. 그래서 시간 맞춰 나가는 아들에게 10시 전에는 들어오라고 신신당부했다.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서둘러 나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자꾸 웃음이 나왔다. 연애는 아들이 하는데 왜 내 마음이 즐겁고 설레는지. 무슨 얘기를 나눌지, 어디서 만날지, 용돈을 더 줬어야하는지 별별 생각들이 떠돌았다. 고백 후 첫 날의 데이트. 얼마나 떨릴까.


내게도 저렇게 시작하는 순간들이 있었는데, 돌이켜보아도 세월이 너무 지나서인지 까마득하기만 하다. 오히려 떨리는 첫 고백과 첫 키스의 순간보다 쓰라렸던 이별과 다툼의 상처들이 먼저 떠오른다. 아들도 언젠가 이런 상처를 보듬겠지만 아직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그저 사랑받고 사랑하는 법만 배워나갔으면 좋겠다. 오직 사랑으로 가득 찬 세상에 머무르면 좋겠다. 충분히 온 마음을 다해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는 과정을 경험하면서 아들의 세상은 어떻게 진해지고 넓어질까. 사랑을 통해 어떻게 성장할까. 그 생각만으로 엄마 가슴은 두근거린다. 아들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지녔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 사람을 소중히 대하고 대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고 있다는 감사가 절로 나왔다. 뒤이어 누군가가 내 아들을 귀하게 여겨준다는 감사에 이어 첫사랑에 빠진 소년의 얼굴을 바로 옆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기쁨이 샘솟았다. 그 마음을 글로 적어둘 수 있다는 기쁨도 더불어서.


약속대로 아들은 10시 전에 귀가했다. 헤어짐의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들어와서는 씻지도 않고 밍기적 거리며 식탁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다. 고백 후 첫 데이트. 슬쩍, 뭐했냐고 물었더니 손잡고 산바카라했단다. 그래, 손을 잡았구나. 손. 뭐라고? 손 잡았어? 나도 모르게 눈이 똥그래졌다. 시작하는 아들의 연애를 곁에서 아름답게 바라보겠다는 다짐이 어디로 날아갔는지. 갑작스레 날아든 스킨십 이야기에 아무 말이나 꺼내버렸다. 아들, 뽀뽀는 아직 안 된다. 알았지? 작은아들은 곁눈으로 나를 흘겨보더니 대꾸도 안하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큰아들이 가볍게 내 등을 토닥여주었다. 경기는 시작도 안했는데 진 기분이 이런 걸까. 괜히 약이 올랐다. 이 마음까지도 아들의 연애를 지켜보는 부모가 감당해야할 몫인가 보다.


아들이 연애를 시작했다. 오십 넘은 내 가슴도 덩달아 뛰기 시작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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