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씨앗, 문명을 묻다 16
수확이 끝나면 농부는 거둔 작물을 여러 몫으로 나눈다. 가족이 먹을 곡식과 시장에 내놓을 농산물이 있고, 다음 농사에 쓸 씨앗도 마련해야 한다. 종자로 남길 것을 골라 내고, 다른 알과 섞이지 않도록 정리하고, 잘 말려 이듬해 파종할 때까지 보관하는 일이 이어진다. 이 작업은 수확량을 늘리는 일처럼 눈에 띄지 않지만, 다음 농사를 시작하는 데 꼭 필요하다. 종자를 마련하지 못하면 농민은 다른 곳에서 씨앗을 구해야 하고, 그동안 재배해 온 작물을 계속 심지 못할 수도 있다. 농가에서 종자를 누가 관리했는지는 단순한 집안일의 분담 문제가 아니다. 어떤 씨앗이 다음 해에도 밭에 심길 수 있었는지를 결정하는 농업의 한 부분이다.
여러 농업슬롯에서 여성은 종자를 고르고 관리하는 일에 참여해 왔다. 그러나 여성이 언제나 종자를 맡았던 것은 아니며, 종자를 다루는 방식도 작물과 지역에 따라 달랐다. 국제식량농업기구(FAO)와 인도 M. S. 스와미나탄 연구재단이 2002년에 펴낸 현장조사는 인도의 여러 지역에서 여성과 남성이 농업생물다양성을 관리하는 방식을 살폈다. 타밀나두주의 콜리 언덕에서는 여성들이 기장류의 재배와 수확 후 작업, 종자 선별과 보관에 폭넓게 참여했다. 반면 케랄라주의 와야나드에서는 벼 종자를 고르고 보관하는 일을 남성이 주로 맡는 공동체도 확인되었다. 같은 나라에서도 작물과 지역의 관습에 따라 담당자가 달랐다. 여성의 종자 관리 역사는 모든 농촌에 똑같이 적용되는 전통이 아니라, 구체적인 농업 환경과 노동 분담 속에서 살펴야 할 역사다.
콜리 언덕의 사례에서 종자를 마련하는 일은 작물을 거두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농민들은 작물이 자라는 동안 상태를 살피고, 종자로 쓸 식물이나 이삭을 골라 두기도 했다. 수확한 뒤에는 알이 충실하게 여물었는지 살피고, 덜 여물거나 손상된 것을 가려냈다. 바람을 이용해 가벼운 껍질과 찌꺼기를 날려 보내는 작업도 필요했다. 선별한 종자는 다른 곡식과 섞이지 않도록 구분해 말리고 보관했다. 작물마다 알맞은 시기와 처리 방법이 달랐으므로 모든 종자를 같은 방식으로 다룰 수는 없었다. 이 작업에 참여한 사람은 씨앗의 상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작물이 자라고 여무는 과정도 살펴야 했다. 종자를 관리한다는 것은 수확물 가운데 일부를 남기는 행동이면서, 다음 농사에 사용할 씨앗을 마련하기 위해 여러 차례 판단하는 일이었다.
종자를 고르는 판단은 한 해의 결과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밭에서 상태가 좋은 식물을 골랐더라도 그 식물에서 받은 씨앗을 다음 해에 심어 봐야 결과를 알 수 있다. 종자를 잘 골랐더라도 보관 중 습기나 해충 때문에 손상될 수 있고, 파종한 뒤 발아가 고르지 않을 수도 있다. 반대로 처음에는 특별히 눈에 띄지 않았던 씨앗이 다음 농사에서 좋은 결과를 낼 수도 있다. 종자를 마련한 사람은 재배와 수확, 보관과 파종을 거치며 앞선 판단을 확인할 기회를 얻는다. 같은 작물을 여러 해 다루면 어떤 작업이 잘되었고 어디에서 문제가 생겼는지 비교할 수 있다. 이런 경험은 한 번의 요령으로 생기지 않는다. 종자를 마련하고 다시 심는 과정이 이어질 때, 그 경험은 다음 해의 판단에 쓰이는 농업지식이 된다.
이 지식은 종자를 고르는 일과 보관하는 일을 구분하면서도 두 작업을 연결해 살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밭에서 어떤 식물을 종자로 남길지 판단하는 일과 수확 뒤 종자를 깨끗하게 정리하고 보관하는 일은 서로 다르다. 그러나 밭에서 좋은 식물을 골랐더라도 종자가 제대로 보관되지 않으면 다음 농사에 사용할 수 없다. 반대로 보관 기술이 뛰어나도 종자의 상태가 좋지 않거나 작물의 특성이 농가의 재배 조건과 맞지 않으면 기대한 결과를 얻기 어렵다. 종자 관리에는 작물의 생육을 살피는 경험과 수확 뒤 종자를 다루는 기술이 함께 필요하다. 여성들이 이 여러 단계에 참여했던 농가에서는 그들이 맡은 작업의 범위만큼 작물과 종자에 관한 경험도 쌓일 수 있었다.
종자를 관리하는 사람이 농사 전체를 결정하는 사람과 같았던 것도 아니다. 어떤 농가에서는 종자를 고르는 사람이 작물의 선택과 재배 방식에도 의견을 내고 실제 결정에 참여했을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종자 선별을 맡은 사람과 토지 이용이나 작물 재배를 결정하는 사람이 달랐을 수 있다. 여성이 종자를 골라 보관했다는 사실만으로 토지나 농업 자원에 관한 결정권까지 가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결정권이 적었다는 이유로 그 사람이 농업지식을 갖지 못했다고 볼 수도 없다. 일을 맡은 사람에게는 그 작업에 관한 경험이 쌓인다. 다만 그 경험이 농사 전체의 결정에 반영되는 정도는 가족의 관계와 재산, 지역의 관습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여성의 노동과 지식을 정확하게 기록하려면 실제로 한 일과 그 일에 부여된 권한을 구분해야 한다.
농업의 역사를 기록하는 방식은 이 노동을 이해하는 데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농업 통계와 공식 기록에는 재배 면적, 생산량, 품종의 보급, 수확 성과처럼 수치로 나타내기 쉬운 정보가 많이 담긴다. 반면 수확 뒤 종자를 골라 내고 다음 파종을 준비하는 일은 가족 안에서 반복되는 작업인 경우가 많아 별도의 기록으로 남지 않을 수 있다. 임금이 지급되지 않는 노동이라면 경제적 성과를 계산할 때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기록이 적다는 사실은 그 일이 없었다는 증거가 아니다. 그렇다고 기록의 공백만으로 여성들이 특정 작업을 널리 담당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농업의 역사를 더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공식 문서뿐 아니라 지역별 조사와 농민의 구술, 실제 재배 관행도 함께 살펴야 한다. 기록에 나타난 생산량만으로는 그 생산을 가능하게 한 노동의 분담을 모두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여성농민 연구는 종자 관리의 경험이 오늘날 토종씨앗 보존 활동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살핀다. 김효정이 2011년 학술지 《농촌슬롯》에 발표한 연구는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소속 여성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토종씨앗 지키기 운동을 다루었다. 이 운동은 씨앗을 모아 보관하는 데만 머물지 않았다. 여성농민들이 농사 과정에서 익힌 지식과 기술을 다시 평가하고, 토종씨앗을 재배하고 이어 가는 실천과 연결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종자를 얻는 것만으로는 농사를 계속할 수 없다. 씨앗을 언제 심을지, 어떤 조건에서 자라는지, 수확한 뒤 어떻게 다시 종자를 마련할지 알아야 한다. 씨앗을 처음 받아 심는 사람에게는 파종과 생육, 채종과 보관의 각 단계가 새로운 배움이 될 수 있다. 농사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도 작물과 재배 조건이 달라지면 새롭게 익혀야 할 일이 생긴다. 토종씨앗을 이어 가는 데 필요한 지식은 씨앗 안에 완성된 형태로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씨앗을 심고 기르고 거두는 과정에서 사람에게도 축적된다.
여성농민의 토종씨앗 보존 활동이 중요한 까닭은 그들이 과거의 씨앗을 그대로 지키는 사람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토종씨앗을 계속 재배하려면 오늘의 농업 조건도 고려해야 한다. 농민은 생산량과 노동 부담, 재배 환경, 판매 가능성 등을 따져 씨앗을 선택한다. 토종씨앗이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해도 재배에 필요한 노동과 비용이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재배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거나 판로를 찾지 못하면 다음 해에도 같은 씨앗을 심기 어렵다. 농민이 직접 종자를 마련하는 과정에는 시간과 기술이 필요하고, 보관 중 손실이나 발아 불량의 위험도 따른다. 여성농민의 지식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들이 전통을 지켜 왔다고 칭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 지식이 실제 농사에서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토종씨앗을 계속 재배하는 데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 살펴보는 일까지 포함한다.
여성의 경험을 중요하게 다룬다고 해서 여성의 판단이 언제나 옳았다고 말할 필요도 없다. 농민은 주어진 정보와 자원 안에서 선택하며, 예상하지 못한 병해나 날씨 때문에 결과가 나빠질 수 있다. 종자를 잘 골랐더라도 보관이 적절하지 않으면 발아가 어려울 수 있다. 새 품종이 기존 씨앗보다 수확량이나 재배 편의성에서 나은 결과를 내는 경우도 있다. 반대로 새로운 품종이 특정 농가의 재배 조건이나 목적에 잘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여성농민도 다른 농민과 마찬가지로 종자를 시험하고 결과를 살피며 판단을 바꾼다. 농업지식은 성별만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실제로 어떤 작물을 다루고 어떤 작업을 경험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경험은 처음부터 완성된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관찰과 실행, 결과의 확인을 거치며 수정되는 지식이다. 이런 점에서 여성농민의 경험을 기록하는 일은 그들의 판단을 무조건 옳다고 인정하는 일이 아니라, 농업의 선택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이해하는 일이다.
종자를 마련하는 방식이 달라지면 그 과정에서 쌓이는 경험도 달라질 수 있다. 종자업체나 연구기관에서 종자를 구매하면 농민은 직접 채종하고 선별하는 일부 작업을 줄일 수 있다. 구매한 종자가 농가의 목적과 재배 조건에 잘 맞는다면 합리적인 선택이다. 직접 종자를 남기는 방식이 언제나 더 낫다고 할 수는 없다. 농가에서 종자를 마련하려면 노동과 시간이 들고, 보관과 발아 과정에서 손실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직접 종자를 마련하는 일이 줄어들면 그 과정에서 작물의 특성을 살피고 종자의 상태를 비교하던 경험도 줄어들 수 있다. 여성들이 종자 관리의 일부를 맡았던 농가에서는 이런 변화가 그들의 작업과 지식이 활용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종자 공급 방식의 변화는 씨앗을 어디에서 구하느냐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농민이 종자를 다루며 익혀 온 지식이 다음 농사에 사용될 기회에도 영향을 준다.
토종씨앗의 보존을 저장된 종자의 숫자로만 평가하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종자가 보관되어 있어도 실제 밭에서 재배되지 않으면 농민이 그 씨앗의 생육과 수확을 경험할 기회가 줄어든다. 반대로 농가에서 계속 재배되는 씨앗은 파종과 생육, 채종을 거치면서 다음 세대로 이어질 가능성을 갖는다. 이 과정에는 식물의 생물학적 특성과 재배 환경뿐 아니라 종자를 다루는 사람의 노동과 판단도 작용한다. 여성들이 그 일을 맡았던 농가에서는 그들의 경험이 씨앗을 이어 가는 조건의 일부가 되었다. 그렇다고 토종씨앗의 역사를 여성의 역할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다. 남성과 다른 가족 구성원의 노동, 작물의 특성, 재배 환경과 경제적 조건도 함께 영향을 미쳤다. 여성의 기여를 제대로 기록한다는 것은 여성에게 모든 바카라임을 돌리는 일이 아니라, 실제로 누가 어떤 일을 했는지 빠뜨리지 않는 일이다.
다음 파종기에 심을 씨앗은 수확 뒤의 선별과 보관을 거쳐 다시 밭으로 간다. 그 씨앗이 얼마나 잘 자랄지는 미리 알 수 없지만, 농민은 앞선 재배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다음 선택을 준비한다. 여성들이 종자 관리의 일부 또는 여러 단계를 맡았던 곳에서는 그들의 노동과 판단도 이 과정에 남아 있었다. 그 역할을 여성의 타고난 성향으로 설명하면 실제 노동의 조건과 지식이 가려진다. 반대로 농업의 공식 기록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역할을 제외하면 씨앗이 이어진 과정의 일부를 잃게 된다. 토종씨앗의 역사를 기록하려면 어떤 씨앗이 남았는지만 살펴서는 부족하다. 그 씨앗을 다음 농사에 쓸 수 있도록 마련했던 사람들의 일과 판단도 함께 기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