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씨앗, 문명을 묻다 15
가을걷이가 끝난 밭에서 농부가 이듬해 심을 씨앗을 따로 남긴다. 그 씨앗은 다음 봄에 밭으로 나가 싹을 틔우고, 여름을 지나 꽃을 피우고, 다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수확철이 되면 농부는 그 가운데 일부를 다음 해에 심을 종자로 남긴다. 이 과정은 한 해 농사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부모에게서 농사를 배운 사람이 자식에게 씨앗을 건네고, 다음 세대가 그것을 다시 심는 일이 여러 해 이어질 수 있다. 한 농가에서 시작된 선택이 여러 세대를 거치는 동안 씨앗의 성질과 재배 방식은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농부가 바카라에 기록하지 않았더라도 식물의 다음 세대에는 앞선 세대의 선택이 남을 수 있다.
농업의 역사를 생각하면 논밭을 개간한 사람이나 새로운 농기구를 만든 사람, 농사법을 기록한 문헌을 먼저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농업의 역사는 글과 도구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농부들은 씨앗을 심고 거두는 일을 반복하면서 식물의 다음 세대에 영향을 주었다. 이 과정은 현대의 육종 연구처럼 계획을 세우고 결과를 측정하는 방식과는 달랐지만, 여러 세대에 걸쳐 반복된 선택은 작물 집단의 유전적 구성을 바꿀 수 있었다. 세계식량농업기구(FAO)도 농민이 여러 세대에 걸쳐 재배하고 선택해 온 농가 품종과 재래종을 작물 다양성의 중요한 일부로 다룬다.
농부가 한 해에 씨앗을 남겼다고 해서 곧바로 새로운 품종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 포기에서 얻은 씨앗을 다음 해에 심어도 그 식물이 똑같은 모습으로 자란다는 보장은 없다. 씨앗이 가진 유전적 특성뿐 아니라 밭의 조건과 날씨, 재배 방법도 식물의 성장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같은 씨앗을 심었는데 어떤 해에는 키가 크고 어떤 해에는 작게 자랄 수 있으며, 병해나 가뭄 때문에 평소와 다른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한 해의 모습만 보고 그 씨앗의 성질을 모두 판단하기는 어렵다. 여러 해 재배하면서 비슷한 특징이 반복해서 나타나는지, 다음 세대에서도 그 특징이 이어지는지 살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개별 식물 하나와 여러 세대에 걸쳐 이어지는 작물 집단을 구분하는 일이다. 농부가 유난히 잘 자란 한 포기를 발견했다고 해도 그 포기 하나만으로 안정된 품종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 식물에서 얻은 씨앗을 다시 심고, 자라난 식물들을 관찰하고, 필요한 경우 다시 씨앗을 남기는 과정이 이어져야 한다. 작물에 따라 씨앗이 만들어지는 방식과 유전적 특성이 달라 결과도 같지 않다. 자가수분이 주로 일어나는 작물과 다른 개체의 꽃가루가 섞이기 쉬운 작물은 다음 세대에서 나타나는 변이의 양상도 다를 수 있다. 농부가 해마다 씨앗을 이어 왔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씨앗이 같은 방식으로 유지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여러 세대에 걸친 농부의 선택은 무엇을 바꾸었을까. 재배되는 작물에는 눈에 잘 띄는 차이뿐 아니라 겉으로는 알아보기 어려운 유전적 차이도 있다. 어떤 식물은 특정한 조건에서 잘 자라고, 어떤 식물은 다른 조건에서 더 잘 자랄 수 있다. 농부가 여러 해 동안 씨앗을 남기는 과정에서 특정한 특성을 가진 식물의 씨앗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면 작물 집단의 구성이 달라질 수 있다. 반대로 농부가 의도하지 않은 변화도 일어날 수 있다. 우연히 섞여 들어온 씨앗이나 꽃가루, 자연적으로 발생한 유전적 변이, 그해의 재배 환경이 모두 작물의 변화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농부의 선택은 식물의 역사를 움직인 중요한 힘이었지만, 모든 변화를 농부가 의식적으로 계획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이런 변화가 오랜 기간 이어져 형성된 농가 품종이나 재래종은 현대의 육종가가 특정한 목표를 세워 개발한 품종과 다른 역사를 가질 수 있다. 재래종은 한 번의 계획으로 완성된 결과라기보다 농민의 재배와 선택, 자연적인 변화, 씨앗의 교환과 보존이 함께 작용하면서 형성된 경우가 많다. 그 안에는 한 가지 모습으로 완전히 통일되지 않은 개체들이 함께 존재하기도 한다.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씨앗이라도 개체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고, 같은 지역에서 재배된다고 해서 유전적으로 모두 동일한 것도 아니다. 농가 품종의 이름과 유전적 다양성이 언제나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종자 연구에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농부들이 남긴 씨앗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이런 차이를 결함으로만 보지 않아야 한다. 현대 농업에서는 크기와 모양이 고르고 수확 시기가 일정하며 기계로 수확하고 가공하기 쉬운 품종이 유리한 경우가 많다. 반면 재래종이나 농가 품종에는 개체 사이의 차이가 비교적 크게 남아 있을 수 있다. 그 차이가 언제나 이로운 것은 아니다. 수확량이 불안정하거나 시장에서 원하는 규격을 맞추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유전적 다양성은 병해나 기상 조건이 달라졌을 때 대응할 수 있는 특성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재래종의 가치는 모든 조건에서 현대 품종보다 뛰어나다는 데 있지 않다. 서로 다른 환경과 필요에 맞춰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특성과 다양성을 지닌다는 데 있다.
농부들이 식물의 역사를 썼다는 말은 그들이 현대 유전학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다. 농부들은 유전자나 유전적 다양성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도 씨앗을 심고, 자란 모습을 살피고, 다음 세대에 남길 씨앗을 마련했다. 어떤 특성이 왜 나타나는지 과학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더라도, 그 특성이 여러 해 반복되는지 관찰할 수는 있었다. 한 해의 실패를 기억하고 다음 해에 다른 씨앗을 심어 보거나, 이웃에게 받은 씨앗을 자신의 밭에서 시험해 볼 수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얻은 지식은 반드시 글로 기록되지는 않았다. 농사짓는 사람의 경험과 작업 방식, 씨앗을 구분하는 이름, 다른 농가와 주고받은 정보 속에 남았다.
문자로 남지 않은 지식이라고 해서 정확하거나 완전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오랫동안 이어진 농사법에도 잘못된 판단이 있었을 수 있고, 어떤 해에 성공한 방법이 다른 해에는 실패할 수도 있었다. 경험은 반복해서 확인하고 수정할 때 더 쓸모 있는 지식이 된다. 농부의 지식은 과거의 방법을 그대로 지키는 데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기존의 방법이 맞지 않을 때 다른 방법을 시도하는 과정에서도 축적되었다. 씨앗을 남기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늘 같은 씨앗을 심었다고 해도 그 씨앗이 밭에서 자라고 수확되는 과정은 해마다 달랐으며, 농부는 그 차이를 경험하면서 다음 농사를 준비했다.
이런 농업지식은 한 사람의 머릿속에만 머물지 않았다. 농사법은 가족 안에서 전해지기도 했고, 이웃의 밭을 살펴보거나 씨앗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기도 했다. 다만 씨앗이 이동한다고 해서 그 씨앗을 다루는 지식까지 저절로 온전히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받은 씨앗이 어느 시기에 잘 자라는지, 어떤 조건에서 수확이 가능한지, 어떻게 채종해야 하는지는 새로 심어 보는 과정에서 다시 확인해야 했다. 지식은 전해지면서도 새 환경과 농민의 경험에 따라 수정되었다. 농업의 역사는 한 사람이 완성한 발명품의 역사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이어받고 시험하고 고쳐 온 지식의 역사이기도 하다.
씨앗의 변화에는 자연과 인간의 작용이 함께 들어 있다. 식물은 유전적 변이를 만들고, 환경은 그 식물이 살아남고 번식하는 조건을 제공하며, 농부는 자신에게 필요한 식물을 선택해 다음 세대로 이어지게 할 수 있다. 이 세 힘은 서로 분리되어 작동하지 않는다. 농부가 특정한 특성을 원해 씨앗을 남겨도 그 식물이 실제로 잘 자랄지는 밭의 조건에 달려 있고, 예상하지 못한 특성이 다음 세대에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재래종의 형성을 농부의 의지만으로 설명하거나 자연의 적응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모두 충분하지 않다. 여러 세대의 재배와 선택, 생물학적 변화가 겹치면서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다양한 씨앗이 형성되어 왔다.
이 역사는 과거에만 머물지 않는다. 지금도 농민이 어떤 씨앗을 심고 무엇을 남기는지에 따라 밭에서 유지되는 작물의 다양성은 달라질 수 있다. 반대로 특정 품종으로 재배가 빠르게 바뀌고 이전에 심던 씨앗의 채종이 중단되면, 그 씨앗을 다시 밭에서 이어 가기 어려워질 수 있다. 유전자은행에 종자를 보관하는 일은 유전적 자원을 지키는 중요한 방법이지만, 저장된 종자가 농가에서 계속 재배되고 선택되는 과정과는 다르다. 농가에서 재배가 이어질 때에는 씨앗뿐 아니라 그 씨앗을 다루는 지식과 사용 경험도 함께 갱신될 수 있다. 종자의 보존은 저장과 재배가 서로 보완할 수 있을 때 더 넓은 의미를 갖는다.
토종씨앗을 바라볼 때도 오래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가치를 결정할 수는 없다. 어느 지역에서 오랫동안 재배되었다면 그 씨앗에는 농민의 선택과 재배 경험이 축적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어떤 특성이 유지되어 왔는지, 재배가 얼마나 이어졌는지, 다른 씨앗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는 각각 살펴야 한다. 토종씨앗은 박제된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농민이 심고 거두고 다시 선택하는 동안 변화할 수 있는 생물학적 자원이자, 농업의 역사와 지식이 얽혀 있는 존재다. 그 씨앗을 보존한다는 것은 옛 모습을 무조건 되살리는 일만이 아니라, 그 씨앗이 가진 특성과 가능성을 이해하고 오늘의 농사에서 어떻게 이어 갈지 판단하는 일이기도 하다.
농부가 씨앗을 남길 때 손에 쥐는 것은 작은 알갱이 몇 개다. 그 안에 여러 세대의 농업 역사가 글처럼 새겨져 있는 것은 아니다. 씨앗의 유전적 구성은 기록된 문장처럼 과거의 모든 일을 알려 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 씨앗이 어떤 작물 집단에서 나왔고, 어떤 환경에서 재배되었으며, 농민들이 어떤 방식으로 이어 왔는지를 조사하면 사람과 식물이 함께 만들어 온 변화의 일부를 읽을 수 있다. 씨앗만으로 역사를 전부 복원할 수는 없지만, 씨앗을 빼고는 농업의 역사를 온전히 설명하기도 어렵다.
농업의 역사를 기록한 바카라에는 왕과 국가, 제도와 기술의 이름이 남아 있다. 밭에서 씨앗을 이어 온 수많은 농민의 이름은 그만큼 많이 기록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의 일이 역사에서 작았던 것은 아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씨앗을 재배하고 남기는 일은 작물의 유전적 다양성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재래종과 농가 품종 가운데 상당수는 그런 반복적인 재배와 선택의 결과다. 농민들은 식물의 역사를 글로 쓰지 않았지만, 그들이 남긴 씨앗은 그 역사가 실제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생물학적 흔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