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인간을 다시 묻다 22
문이 갑자기 닫히면 몸이 먼저 움찔할 때가 있다. 소리를 듣고 놀랐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어깨가 올라가고 심장이 뛴다. 곁에 있던 사람은 문 쪽을 한번 바라보고 하던 일을 계속한다. 어떤 사람은 금세 움직이지만, 어떤 사람은 한동안 주변을 살핀다. 같은 소리를 들었는데 반응은 다르다.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만으로는 그 차이를 설명하기 어렵다. 지금 들은 소리는 같아도, 그 소리를 받아들이는 몸이 지나온 경험은 같지 않기 때문이다.
뜨거운 냄비에 손을 댄 사람은 다음에 냄비를 옮길 때 손잡이를 살핀다. 미끄러져 넘어진 사람은 비가 온 길에서 발을 조심한다. 한 번 겪은 일이 다음 행동을 바꾸는 것이다. 우리는 매번 처음부터 모든 상황을 판단하지 않는다. 뇌와 신경계는 경험을 바탕으로 위험을 예측하고, 몸은 그 예측에 맞추어 움직임을 준비한다. 위험을 빨리 알아차리는 능력은 사람을 지켜 왔다. 그런데 위험이 사라진 뒤에도 경계가 풀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지금은 안전한데 몸은 여전히 위험에 대비하고, 머리로는 괜찮다고 판단하면서도 긴장을 멈추기 어려울 수 있다.
기억이 몸에 남는다는 말은 과거의 장면이 몸속 어딘가에 사진처럼 보관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다. 경험은 감각과 감정, 상황을 판단하는 방식, 그때 익힌 행동에 영향을 준다. 어떤 소리는 위험했던 순간과 연결되고, 특정한 장소나 목소리는 이유를 설명하기도 전에 불안을 일으킬 수 있다. 몸의 반응이 늘 의식적인 판단 뒤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어서, 자신이 왜 긴장하는지 당사자도 곧바로 설명하지 못할 때가 있다.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뒤 기억이 반복해서 떠오르거나 관련된 상황을 피하고, 지나치게 경계하는 상태가 오래 이어져 일상생활에 큰 어려움을 겪는 경우에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고통스러운 일을 겪은 모든 사람이 같은 장애를 겪는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반응이 다르고, 사건 이후의 안전과 관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환경도 회복에 영향을 준다.
과거의 경험은 위험을 피하는 반응에만 남지 않는다. 한 번 실패한 일을 다시 해야 할 때, 시작하기도 전에 실패할 가능성부터 떠오를 수 있다. 예전에 거절당했던 사람을 다시 만나거나 비슷한 자리에 들어서면 몸에 힘이 들어간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지난번의 일이 이번 상황에 먼저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런 예상에는 실제로 겪은 어려움이 근거로 놓여 있다. 무조건 잊으라거나 자신감을 가지라는 말로 해결되지 않는 이유다. 다만 지난번에 실패했다는 사실이 이번에도 실패한다는 결론으로 굳어지면, 아직 확인하지 않은 가능성까지 닫아 버릴 수 있다. 과거에 배운 것은 다음 위험을 피하도록 돕기도 하지만, 이미 달라진 상황에서도 같은 결과를 예상하게 만들 수 있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에 등장하는 셉티머스 워런 스미스는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이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의 세계는 전쟁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죽은 전우 에번스의 모습이 그의 의식에 되살아나고, 주변의 소리와 풍경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다가온다. 아내 레치아는 남편 곁에 있지만 그가 겪는 세계를 대신 살아줄 수 없다. 의사들은 그를 일상으로 돌려보내려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요구만으로는 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과 전쟁을 겪은 사람의 고통이 끝났다는 사실은 같지 않다.
셉티머스가 겪는 일은 주변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는 평범한 거리와 소리가 그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경험으로 다가온다. 주변 사람들은 눈앞에 드러난 행동을 보고 그를 판단하지만, 그 행동이 어떤 경험과 연결되어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우리도 누군가의 반응을 보고 성격이나 태도를 쉽게 판단한다. 왜 그렇게 놀라는지, 왜 같은 일을 망설이는지, 왜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지 못하는지 묻는다. 그렇다고 눈에 보이지 않는 사연을 마음대로 상상하는 것이 이해는 아니다. 과거의 상처가 있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 역시 그 사람을 하나의 설명 안에 가두는 일이다. 필요한 것은 모르는 사정을 지어내는 일이 아니라, 눈앞의 반응만으로 그 사람을 다 안다고 여기지 않는 태도다.
나 역시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몸이 생각한 속도를 따라주지 않을 때가 있다. 움직임이 뜻대로 나오지 않거나 말을 전하는 데 시간이 걸리면, 해야 할 일보다 그 과정에서 겪을 어려움을 먼저 떠올리기도 한다. 새로운 일을 앞두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살피기 전에 몸의 한계와 다른 사람의 반응부터 예상할 때도 있다. 일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전에 겪었던 어려움이 다음 상황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몸의 제약은 실제로 존재하고, 사람들의 반응도 언제나 편안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런 예상을 단순히 소심함이나 자신감 부족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다만 이전의 어려움이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까지 미리 결정하게 두면, 아직 해보지 않은 일도 시작하기 어려워진다.
여기에는 개인의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어떤 사람이 새로운 일을 시도할 때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구해야 하고, 말을 끝까지 할 시간을 얻지 못하며, 몸의 속도에 맞는 조건을 보장받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실제로 더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주변에서 그가 해내기 어렵다고 먼저 판단하면 시도할 기회도 줄어든다. 기회가 줄어들면 자신의 능력을 확인할 기회도 줄고, 그 결과는 다음 시도에 대한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개인이 과거의 경험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동안 슬롯의 태도는 그 경험을 반복하게 만들 수도 있다. 반대로 충분히 기다려 주는 사람을 만나고 필요한 조건이 마련된 자리에서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면, 이전과 다른 결과를 경험할 수 있다. 그 경험이 지난날을 없애 주지는 않지만, 과거가 미래를 대신 결정하지 못하도록 돕는다.
지나간 경험을 모두 잊는 것이 회복은 아니다. 위험을 알아차리게 해준 경험도 있고, 자신에게 필요한 조건을 알게 해준 경험도 있다. 어떤 경험은 여전히 나를 지키지만, 어떤 예상은 달라진 상황에서도 행동을 제한한다. 둘을 구별하려면 실제로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새로운 경험을 통해 달라질 수 있는 것도 있고, 전문적인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도 있다. 때로는 개인의 노력보다 주변의 조건을 바꾸는 일이 먼저다. 고통스러운 반응이 오래 이어져 일상생활을 어렵게 한다면 혼자 견디도록 요구해서는 안 된다. 몸은 관계와 환경 속에서 살아가며, 그 관계와 환경은 몸이 다음 일을 예상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준다.
이 문제는 용서와 화해를 말하는 신앙에도 질문을 던진다. 상처 입은 사람에게 용서하라고 재촉하면, 그 사람은 아직 감당하지 못한 일을 서둘러 정리해야 한다는 부담까지 떠안을 수 있다. 잘못한 사람의 바카라임을 묻지 않은 채 관계를 회복하라고 요구하면 상처를 만든 조건은 그대로 남는다. 용서가 바카라임을 없애는 말이 되어서는 안 되며, 화해가 피해자의 안전과 선택을 뒤로 미루는 일이 되어서도 안 된다. 잘못을 인정하고 바카라임을 감당하는 일, 같은 상처가 반복되지 않도록 관계와 환경을 바꾸는 일, 상처 입은 사람이 자신의 속도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기다리는 일이 함께 필요하다. 고통받는 사람 곁에 선다는 것은 빨리 괜찮아지라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다시 다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함께 마련하는 일도 신앙의 바카라임이다.
문이 세게 닫히는 소리가 난다. 누군가는 움찔하고, 누군가는 문 쪽을 바라보다가 하던 일을 계속한다. 우리는 그 차이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를 수 있다. 모른다는 사실은 이유를 마음대로 만들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지금 눈앞에 드러난 반응만으로 그 사람의 성격이나 능력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몸은 지나온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을 받아들이고 다음 일을 예상한다. 그 예상은 한 사람의 의지만으로 바뀌지 않지만, 반드시 평생 같은 모습으로 남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그 사람이 살아가는 조건도 앞으로 그 몸이 겪을 경험의 일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