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지내고 맞이한 봄
2026년 4월. 지난주까지 차갑던 공기도 멀찍이 물러났고, 뺨에 닿는 바람의 부드러운 온기가 완연한 봄을 알리고 있었다.
거실 창문 너머로 흐드러지게 피어난 벚꽃 잎이 봄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아침. 해수는 전신거울 앞에서 베이지색 재킷의 옷깃을 매만지며 가볍게 손을 앞으로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화장대 위에 놓인 캘린더에는 붉은 펜으로 크게 동그라미가 쳐진 오늘 날짜가 보였다.
"윤해수 팀장님, 오늘 아침은 쇠고기 미역국입니다. 출근 준비 다 하셨습니까?"
주방 쪽에서 고소한 냄새와 함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수가 거실로 나가자 짙은 네이비색 앞치마를 두른 도윤이 식탁 위에 반찬들을 정갈하게 세팅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코스메틱 브랜드 마케팅 팀장이었던 해수는 특유의 기획력을 인정받아 어느덧 본사 최연소 본부장 승진을 목전에 둔 핵심 인재가 되어 있었고, 도윤은 그녀의 곁에서 완벽한 내조를 담당하는 전업주부로 살아가고 있었다.
"매일 아침 이렇게 진수성찬을 차려주니, 내가 살이 빠질 틈이 없잖아."
해수가 투정 부리듯 말하며 식탁 의자에 앉자, 도윤이 빙긋 웃으며 그녀의 밥그릇 위에 도톰한 계란말이를 얹어주었다.
"본부장 심사 앞두고 매일 야근하면서 밥도 제대로 안 챙겨 먹는 사람이 누군데. 밖에서 전쟁 치르려면 속이 든든해야지. 잔말 말고 남기지 말고 싹싹 다 드세요."
조금 옅어진 선홍빛 입술 사이로 도윤 특유의 다정하고, 따뜻한 잔소리가 흘러나왔다. 해수는 미역국 국물을 한 술 떠먹으며 맞은편에 앉은 도윤의 얼굴을 찬찬히 응시했다. 과거 건강하게 회사를 다니던 20대 후반 시절에 비하면 얼굴살도 빠지고, 체격도 조금 더 왜소해졌지만, 그의 얼굴엔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깊은 평온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따스한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도윤의 맑은 미소를 보고 있자면, 해수는 아직까지도 가끔 이 모든 것이 꿈만 같아 마음 한구석이 저릿해지곤 했다.
시간은 2021년 12월, 시리고도 아팠던 그 계절을 지나 어느덧 벌써 4년을 훌쩍 흘러 있었다. 지독하게도 추웠고 긴 긴 겨울밤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도윤아... 서도윤.'
심장이 터질 것 같던 그날 새벽, 기계에 의지해 간신히 숨을 몰아쉬던 도윤이 며칠 만에 기적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던 그 순간을 해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산소마스크 안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초점이 없는 눈으로 허공을 헤매던 도윤은, 제 손을 부서져라 쥐고 엉엉 울고 있는 해수를 발견하고는 흐리멍덩했던 정신을 붙잡았다.
"해.. 수야..."
갈라진 목소리로 간신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를 향해 해수는 품에 안고 있던 낡은 가죽 일기장을 그의 가슴팍에 툭 떨어뜨리며 오열했다.
"이 미련한 바보야... 넌 진짜 나쁜 놈이야. 네 맘대로 나 살려놓고 도망가면, 혼자 남은 내가 매일매일 무슨 마음으로 살라고 그런 끔찍한 짓을 해! 내가 네 생명을 대신해 살았다는 거 알고 나면 제정신으로 살 수 있을 줄 알았어?"
도윤의 얼굴이 당혹감과 슬픔으로 교차했다. 자신이 완벽할 거라고 생각했던 거짓말과 희생이 모두 들통났다는 사실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붉어진 눈시울로 해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네가 했던 약속 모두 파기한다고 했어. 계약 그까짓 거 뭐라고. 나 살리겠다고 네 시간 내어준 거, 내가 하늘에다 대고 심하게 억지 좀 부렸지. 모두 다 되돌려달라고. 네가 없으면 나 어차피 당장 죽어버릴 거니까, 신도 어쩔 수 없었을 거 같아. 그러니 네가 깨어난 거 아니겠어?"
엉망이 된 얼굴로 훌쩍이며 말하는 해수의 이마를 도윤이 손을 들어 조심스레 쓸어 넘겨주었다. 산소마스크에 가려진 그의 입술이 천천히 호선을 그렸고, 그의 눈꼬리를 타고 눈물방울이 베개 위로 툭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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