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마침내, 완성하는 사람

퇴고 (1)

by은수

퇴고를 문장 다듬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다. 조사를 바꾸고, 같은 단어를 반복하지 않고, 문장을 조금 더 예쁘게 만드는 과정. 물론 그런 일도 퇴고에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우선 퇴고가 내 글이 정말 하고 싶은 말을 찾아가는 과정이길 바란다.

이번 연재에는 전에 문학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던 내 원고를 예시로 이 글이 초고와 퇴고의 과정을 거치며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초고 일부)

복숭아

가위를 쥔 손은 탯줄을 가르듯 상자를 묶었던 플라스틱 끈을 잘랐다. 상자를 덮은 뚜껑을 조심히 들췄을 때 아! 짧은 탄성이 먼저 터졌다. 나는 마치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처럼 몹시 실망했다. 차마 산모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아이를 받은 산파가 된 것 같았다.


배송 완료 문자를 받았을 때 복숭아 향은 이미 현관까지 진동했다. 복숭아 향만큼이나 잘 익은 복숭아가 도착했길 바라면서도 나는 불길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그건 미덥지 못한 복숭아 상자 때문이었다. 상자는 무척 얇았고 낮은 데다 좁기까지 했다. 안 그래도 다루기 예민한 복숭아를 보호하기엔 터무니없이 허술해 보였다.


예상한 것보다 상자 속 상황은 더 나빴다. 무엇보다 내용물을 보호하기 위해 끝까지 유지돼야 할 상자의 균형이 무너진 게 가장 큰 원인이었다. 제법 알이 굵은 열네 개 복숭아는 상자 왼쪽에 죄다 몰려 있었다. 배송 중 이리저리 시달리며 서로 상처를 입힌 탓에, 어디 하나 성한 데가 없었다. 그야말로 복숭아 폭행 사건이 따로 없었다.


달콤한 복숭아 한쪽 맛볼 기대는커녕, 나는 복숭아를 두고 하필, 폭력이나 폭행 사건 따위 단어를 떠올리고 있었다. 급기야 짓눌린 복숭아 사이에서 사각형으로 변형된 복숭아까지 발굴되자, 그만 실소가 터졌다.


보충제도 넣지 않은 얇은 상자에 누군가 복숭아를 담기로 한 순간, 이미 이 사태는 피할 수 없었다. 그보다도 먼저, 제주도에 사는 내가 500 KM 나 떨어진 복숭아 농장에 주문서를 넣을 때부터 충분히 예상할 수 있던 일이었다. 도대체 난 어쩌자고 복숭아를 온라인 구매할 생각을 했을까. 더구나 나는 문만 열고 나가면 과일가게가 지천인 동네에 살고 있지 않은가? 순간에 허술한 판단과 충동적인 구매 대가는 내게 성가신 뒤처리를 배송 완료하고 만 것이다.


이 글은 어느 해 여름 복숭아를 배송받은 이야기다. 처음 원고를 쓸 때 나는 복숭아가 상했다는 사실을 최대한 실감 나게 전달하려 했다. 상자가 허술했고, 뭉개진 복숭아, 배송 과정이 문제였다는 이야기를 쓰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원고를 일부러 며칠쯤 보지 않다가 다시 꺼내 읽었을 때, 뭔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문장은 나쁘지 않았다. 묘사도 있었다. 그럼에도 진짜 할 말을 하지 못한 것 같은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배송된 복숭아 이야기를 썼지만, 사실 뭉개진 복숭아를 본 순간, 오래전 기억 하나가 동시에 떠올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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