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겨울, 타슈켄트에서

함박눈이 내리던 침간산, 마음에 남은 사람들

by파르밧
떠날 수 있는 자유를 찾아 세상을 향했다. 여행의 끝에 돌아갈 곳과 함께할 사람의 소중함을 생각한다.


다시 타슈켄트로

여행의 끝을 향하고 있다. 히바에서 우르겐치까지 택시로 이동한 뒤, 국내선으로 약 한 시간 반을 날아 타슈켄트에 내렸다. 낯설었던 도시가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빛과 호수, 야경 명소인 매직시티(Magic City) 근처에 숙소를 정했다. 도심에 위치해 이동이 편리했다.


혼자 하는 여행이 늘 마음까지 편한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골목을 걸으면서도 불안과 걱정이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지나온 시간과 앞으로의 삶이 교차했다.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도 마냥 행복할 수만은 없었다. 그렇다고 여행이 무의미해진 것은 아니었다. 낯선 곳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변하는 감정을 마주하는 일 역시 여행의 일부였다.


타슈켄트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침간산(Chimgan)이었다.


겨울, 순백의 산으로

타슈켄트에서 차로 한두 시간이면 서부 톈산산맥의 침간산에 닿는다. 해발 3,309m의 대침간산을 중심으로 펼쳐진 산악지대는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 즐겨 찾는 자연 휴양지다. 여름에는 초록 산자락을 따라 트레킹을 하고, 겨울에는 눈 덮인 슬로프를 찾아 스키어들이 모여든다. 산자락에 다양한 리조트와 숙박시설이 자리하고 있다.


가는 길에 차르박 호수가 나타난다. 톈산의 눈 녹은 물과 강물이 모여 만들어진 거대한 인공호수다. 여름에는 수상 레저와 휴양객으로 붐비지만, 겨울에는 눈 덮인 산과 푸른 호수가 조용히 대비를 이룬다.


IMG_6209.jpg차르박 호수(Charvak Reservoir)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북동쪽 텐산산맥 기슭에 위치한 대규모 인공 담수호


침간산을 찾은 때는 12월이었다. 타슈켄트에서 인연을 맺은 드라이버 K와 함께 길을 나섰다. 한국 유학 경험이 있어 한국말이 능숙한 친구였다.


“우즈베키스탄 여행은 어땠어요?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도시를 벗어나자 희뿌연 먼지가 가시고 산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눈이 내렸다. 처음에는 가볍게 흩날리던 눈발이 산악마을로 들어설수록 굵어졌다. 이내 함박눈이 되어 도로를 하얗게 덮었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산과 나무도 온통 눈에 묻혀갔다.


침간산 마을로 올라가는 경사진 도로에 이르렀을 때였다. 앞서가던 차들이 하나둘 멈춰 섰다. 바퀴가 헛돌았다. 운전자들이 몇 번을 시도해도 언덕을 오르지 못했다. 결국 차들이 방향을 돌리기 시작했다. 우리도 돌아가야 하나 싶었다.


그때 K가 뜻밖의 방법을 택했다. 차를 돌려 후진으로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이 쌓인 경사로는 만만치 않았고. 미끄러지던 바퀴는 이내 멈춰서고 말았다. 나도 외투를 껴입고 차에서 내렸다.

함박눈이 쏟아지는 길 위에서 주변 사람들과 함께 차를 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뒤에서 밀고, 누군가는 바퀴 주변의 눈을 치웠다.


“하나, 둘, 셋!”


36e87cd1-594f-46f9-a7ab-b89a74379d06.jfif눈 덮인 길 위에서 마주한 사람들의 배려는 오래 기억된다


힘을 모을 때마다 차가 조금씩 움직였다. 누군가 소리쳤고, 우리는 다시 밀었다. 눈은 그칠 줄 몰랐다. 옷과 머리 위로 눈이 쌓였다. 차는 조금씩 언덕을 올라섰다. 마침내 경사로를 벗어나자 환호가 터졌다. 서로 마주 보며 옷에 쌓인 눈을 털어냈다.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한편이었다.


산속 레스토랑에 들어섰을 때 따뜻한 음식이 무엇보다 반가웠다. 주문한 음식은 우즈베키스탄 전통 수프 쇼르바(shorva)였다. 큼직한 고기와 담자, 당근, 토마토를 넣고 푹 끓여낸다. 진한 국물 맛과 신선한 허브향도 좋았다. 따뜻한 국물 한 그릇이 몸을 녹여준다. 차가운 눈길에서 한참을 보낸 뒤 마주한 식사와 시원한 맥주 한 잔. 그날의 맥주는 유난히 맛있었다. 창밖으로는 하얀 눈이 쉼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IMG_9034.jpg우즈베키스탄 전통 수프, 쇼르바(Shirva)


돌이켜보면 그날 가장 선명하게 남은 것은 웅장한 산도, 아름다운 설경도 아니었다. 눈길에 멈춰 선 차를 함께 밀어주던 사람들, 아버지에게 배운 방법이라며 후진으로 언덕을 오르던 드라이버, 그리고 언덕을 올라선 뒤 서로 마주 보며 웃던 순간이었다.


산을 내려가기 전 산악 휴양 시설로 유명한 마운틴 리조트(Chimgan Mountain Resort)를 둘러보았다. 직원이 객실과 부대시설을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깨끗하고 조용한 객실은 눈 내리는 산속에 자리한 작은 안식처 같았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마당에서는 리조트에 머물던 사람들이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 눈을 뭉쳐 던지자 다른 사람이 몸을 피했다. 웃음소리가 고요한 겨울 산속에 울려 퍼졌다. 창가에 서서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Gemini_Generated_Image_b5fo6b5fo6b5fo6b.png침간산 마운틴 리조트(Chimgan Mountain Resort) ㅣ 우즈베키스탄의 알프스 대침간산에 자리한 대표 산악 휴양지이다


수많은 길을 걸으며 스쳐 간 아름다운 풍경들, 그리고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남극의 거대한 빙하 앞에서도 가슴이 뛰었었다. 지금 내 마음에 와닿은 것은, 눈 내리는 겨울날 누군가와 함께 웃을 수 있는 시간, 하루를 마치고 편안히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타슈켄트로 돌아온 저녁, 매직시티를 걸었다. 유럽풍 건물과 화려한 조명으로 꾸며진 테마파크다. 디즈니랜드를 연상시키는 성과 세계 여러 도시의 거리를 재현한 상점가가 이어져 있었다. 밤이 되자 형형색색의 불빛이 거리를 밝혔다. 호숫가 야경을 즐기는 사람들로 붐볐다. 신나는 음악이 흐른다. 젊은 연인들이 사진을 찍고, 부모들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걸었다. 어디를 가든 가족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두고 온 일상과 사람들도 떠올랐다.


배낭을 메고 어디로든 떠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가슴 부풀던 날들이 있었다.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설레었고, 낯선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행복을 느끼는 순간들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여행의 끝에서

언제부터였을까. 좋아하던 여행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고, 어머니는 오랫동안 병원에 계셨다.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람과도 멀어졌다. 익숙했던 일상이 흔들리고 있었다. 다시 배낭을 멨다. 달라진 삶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 파미르를 지나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어진 이번 여행도 그랬다.


낯선 곳에 도착한다고 마음까지 새로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예전 같았으면 작은 골목 하나, 처음 보는 시장의 풍경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을 것이다. 하지만 혼자 밥을 먹고 숙소로 돌아오는 밤이면 문득 마음이 가라앉곤 했다. 무엇을 찾아 그토록 길을 걸어왔을까.


떠날 수 있다는 자유가 좋았다.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일이 즐거웠다. 그렇게 시작한 여행은 어느새 직업이 되었다. 고단한 여정을 마치고 돌아오면 다시 다음 여행을 준비했다. 세상의 여러 곳을 오가는 동안 정작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의 시간을 놓치고 있었던 것일까?


시간은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누나에게서 병원에 계신 어머니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이 왔다. 창밖의 아련한 불빛을 바라보며 깨달았다. 낯선 도시를 헤메는 동안에도 집에서는 변함 없이 현실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 삶에서 마주하는 소중한 순간들은 여행지에서처럼 언제든 되돌아가거나 쉽게 바꿀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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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여행을 계속될 것이다. 길 위에 서는 것을 사랑하고, 미지의 세상 앞에 가슴이 설렌다. 세상에는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많다. 품고 싶은 풍경과 만나고 싶은 사람들도 많다. 어디로 떠날 것인가만큼이나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타슈켄트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매직시티 호숫가 카페 창밖으로 불빛이 아련히 반짝였다.그 빛을 바라보는 낯선 도시의 밤이 이상하리만큼 따뜻했다. 마음에 품은 소박한 답 하나가 남았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글·사진 김진홍


일부 사진은 직접 촬영한 원본을 바탕으로 AI를 활용해 계절감과 현장 분위기를 재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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