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실에서 제일 연세가 많은 왕언니 학생이 있습니다. 그 학생은 올해 84세입니다. 허리가 약간 구부정하고 무릎이 좀 아픈 증세 외에는 건강하고 체격도 다부진 학생입니다. 연세가 많으신데도 목소리도 쩌렁쩌렁하고 경우 밝은 어르신이어서 학생들이 다 왕언니를 따르는 편입니다.
그 학생이 요즘 표정이 어둡습니다. 수업시간에도 종종 한숨을 쉬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저는 쉬는 시간에 그 학생을 살며시 불렀습니다.
"어머니, 요새 무슨 일 있으신가요? 표정이 어두워 보이세요."
학생은 한동안 말을 않고 있다가 가까스로 말을 꺼냈습니다.
"아들놈이 집을 담보로 또 대출을 받았어요."
남편이 돌아가신 후, 살던 단독주택을 아들과 공동명의로 해주셨답니다.
그 왕언니 학생은 단독주택 2층에 살고 계시고, 아래층과 3층, 옥탑방에 세를 받으며 생활비로 쓰시는 모양입니다. 집을 공동명의로 해주었더니 자영업을 하는 아들이 장사가 잘 안 된다며 자꾸 대출을 받아서 빚이 늘어나고 있고, 그 이자를 그 학생이 갚고 있다고 합니다. 엄마와 상의도 없이 대출을 받는 아들에게 그때마다 싫은 내색 하기 싫어서 말을 안 했는데, 이번에 또 대출을 받아 한계치에 도달한 모양입니다. 학생은 이러다가 집이 경매에 넘어가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왕언니 학생은 6.25 사변이 지난 후, 나라가 경제적으로 궁핍한 때 태어나셔서 공부는 꿈에도 못 꾸었습니다.
먹고살 것도 없는 형편에 학교에 다닌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거였죠. 아버지는 언니만 학교에 보냈던 모양입니다. 학교에 가고 싶어서 아침마다 언니를 따라 학교에 가곤 했습니다. 언니는 교실에 들어가는데 학생은 교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운동장에서 학교가 끝날 때까지 언니를 기다렸습니다. 언니의 공부하는 모습을 창밖에서 몰래 지켜보다가 그것도 여의치 않자 운동장 바닥에다가 '가, 나, 다, 라, 마, 바, 사'를 끝도 없이 쓰고 지우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가르쳐준 글자였지요. 아무리 가나다라마바사를 쓰고 지우고 또 써도 언니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학교가 끝나 언니와 함께 걸어서 집으로 갔습니다. 저녁이 되어 아버지가 들어오자 학생은 아버지에게 학교에 보내달라, 떼를 썼습니다. 아버지는 종이와 연필을 가져와서 이것만 쓰면 학교에 안 가도 된다며 '가나다라마바사'를 쓰라고 했습니다. 그날따라 학생은 분이 나서 아버지에게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도 언니처럼 학교 보내달라고! 이딴 것 집어치우고 학교 보내달란 말이야!"
울면서 소리 지르는 딸에게 아버지는 회초리로 학생의 등을 내려치며 울더랍니다.
"학교에 보낼 형편이면 왜 안 보내겠냐!"
학생은 가나다라마바사 쓴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밖으로 나가 처마밑에서 울었습니다.
그 후로 언니 따라 학교 가는 걸 단념하고 일만 했다고 합니다. 집안일이며 밭일, 논일 닥치는 대로 말입니다.
일하다가 언니와 다른 친구들이 학교에 가는 것을 보면 학생은 외면하고 일만 했습니다.
밤마다 예쁜 옷을 입고 학교에 다니는 꿈을 꾸곤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닥치는 대로 일을 하고 공장에 가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결혼하고 나서는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장사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80이 넘자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싶은 마음이 자리 잡기 시작하고 삶이 허망해졌습니다. 딸이 수소문해서 알려준 학교가 우리 학교였습니다. 한글을 배우고 하나하나 알아가는 재미에 빠져 세상사는 맛을 새롭게 느꼈습니다. 이제는 경제적으로도 먹고 살만 해서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자꾸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으니 불안해졌습니다. 이러다가 집도 날리게 되진 않을까 하는 불안 말입니다.
"지 애비 닮아 장사 안 된다고 말도 못 하고 혼자 끙끙 앓더니, 결국 또 일을 저질렀어유."
학생은 아들의 입장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자영업을 하는데 하루가 다르게 손님이 끊기고 월세도 못 내고 속이 타들어갔던 차였습니다. 하는 수없이 어머니가 아시면 속상해할까 봐 몰래 대출을 받고 금방 갚을 생각이었던 거죠. 은행에서 보낸 대출통지서를 본 학생은 아무 말없이 한숨만 쉬었지만, 아들은 어머니를 피해서 새벽녘에 나갔다가 밤늦게 들어오는 모양입니다.
왕언니의 사정을 반 학생들은 다 알고 있었습니다.
반 학생들 사이에서 걱정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게 집은 자식 주는 거 아니여. 늙어서는 돈이 효자라니께."
"맞아, 자식한테 전부 쥐여주면 쪽박 차기 십상이지."
가뜩이나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왕언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습니다.
"남의 일이라고 함부로 말들 하지 말어! 나도 몰라서 그러는 거 아니니께, 그만들 혀!"
왕언니의 날 선 소리에 순식간에 교실 안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모두가 빠져나간 교실은 휑하고 적막했습니다.
왕언니가 앉았던 바카라상 위에는 꾹꾹 눌러쓴 삐뚤빼뚤한 글자들로 가득 찬 공바카라 한 권이 놓여 있었습니다. 빽빽한 글씨 안에는 학생의 서러움과 회한, 지금이라도 배울 수 있어서 뿌듯한 성취감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습니다. 세월의 모진 풍파를 견디고서야 겨우 이룬 학교 생활이었지만, 그나마 공부를 하지 못하고 주저앉게 될까 봐 불안해하던 그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저마다의 어쩔 수 없는 사정을 안고 살아가는 듯싶습니다. 내일은 또 어떤 모습으로 이 교실에 들어올지 학생들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떠올리며 텅 빈 교실을 뒤로하고 교실을 나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