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영어 시험 중

몰라도 당당한 학생들

by무하

오늘은 영어 알파벳 시험을 보는 날입니다.

대문자 옆 괄호 안에 소문자와 그에 맞는 한글 발음을 써넣는 문제입니다.

평소 수업 때 곧잘 하던 분들도 ‘시험’이라는 딱지가 붙으니 영 어색한 모양입니다.

시험지를 받아 든 학생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습니다. 갸웃거리고, 눈동자는 옆 사람을 향해 바쁘게 움직입니다. 심지어 국어 노트에 알파벳 표를 살짝 붙여놓고 컨닝을 하려다 딱 걸린 분도 계십니다.


학기 초부터 몇 달째 반복해서 익혔건만, 아직도 제자리걸음인 이유를 도통 모르겠습니다.

시험지를 걷어보니 그야말로 가관입니다. 제대로 쓴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까요.

"도대체 왜 이렇게 안 외워질까요?"

제가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한 학생이 받아칩니다.

"선생님, 그걸 다 알면 천재게요? 모릉께 학교 다니쥬, 다 알믄 뭐하러 여기 오겄어유!"

옆에 있던 분도 질세라 거듭니다.

"우리가 다 알면 선생님이 심심하실까 봐, 일부러 틀리는 거구만요!"

교실 안이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됩니다.

엉망으로 써놓고도 어찌나 당당하신지, 말솜씨는 청산유수가 따로 없습니다.

"그란께 공부도 한때여. 젊을 때 해야지요, 나이 든께 머리가 녹슬어서 도통 안 들어와요."

"맞아, 한쪽 귀로 들으면 바로 옆 귀로 나가브러."

너도나도 한마디씩 보태는 통에 웃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칠십 중반이 넘은 나이에 알파벳과 씨름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어요.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아무리 정성스레 가르쳐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느껴져 힘이 빠질 때도 있습니다.그래도 매일 학교에 나와 환하게 웃어주시는 학생들을 보면 다시 기운이 납니다.

"선생님도 우리 나이 돼보시먼 아실 거요."

너도나도 한마디씩 보태는 통에 교실은 웃음이 끊이지않습니다.

오늘도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늦은 나이에도 바카라가방을 챙겨 학교로 향하는 학생들. 그 유쾌한 웃음과 멈추지 않는 발걸음이, 사실은 저에게 더 큰 용기를 줍니다.

영어 실력은 조금 더디게 늘지 몰라도, 이 교실 안에 쌓이는 우리의 행복한 시간만큼은 누구보다 깊고 따뜻하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