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친 게 아니라, 없는 걸 찾아 들어갔다.
밤 열한 시. 닫힌 방문 안에서, 한 아이가 웃고 있다.
엄마는 그 웃음을 오래 못 봤다. 밥상에서도, 성적표를 받아 든 날에도 없던 웃음이다. 문 너머에서 아이는 누군가와 말을 주고받는다. 빠르게, 즐겁게, 살아 있는 목소리로. 엄마가 모르는 이름들을 부르고, 엄마가 모르는 말로 웃는다.
아이의 화면 안에서는, 지금 여섯 사람이 아이를 기다린다.
"형, 어디예요. 형 없으면 우리 못 깨요."
아이는 그 한마디에 어깨를 편다. 여기서 아이는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다. 아이가 들어가야 판이 열리고, 아이가 길을 알아야 모두가 따라온다. 아이는 오늘도 앞장서서 길을 낸다. 뒤에서 여섯 사람이 아이를 부른다. 형, 형.
학교에서는 아무도 그 아이를 부르지 않는다.
교실에서 아이는 뒤에서 두 번째 줄, 창가에 앉는다. 이름이 불리는 건 출석을 부를 때뿐이다. 수업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된 지 오래고, 아무리 애를 써도 성적은 오르지 않는다. 애쓴 만큼 오르기는커녕,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이는 언제부턴가 애쓰기를 그쳤다.
그런데 게임 안에서는 다르다.
여기서는 애쓴 만큼 정확히 오른다. 한 판을 이기면 점수가 오르고, 시간을 들이면 등급이 오른다. 속이지 않는다. 현실에서는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그 정직한 보답을, 아이는 화면 안에서 처음 만났다. 열심히 하면 오른다는 것. 그 단순한 약속이 여기에는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있다. 아이를 필요로 하고, 아이를 기다리고, 아이가 없으면 아쉬워하는 사람들. 얼굴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지만, 그들은 아이를 '형'이라 부른다. 그 부름 앞에서 아이는 처음으로, 어딘가에 자기 몫이 있다고 느낀다.
엄마는 문 앞에서 그 웃음소리를 듣는다.
처음에는 화가 났다. 공부는 안 하고 밤새 저러고 있다니. 그런데 오늘은 문득 다른 생각이 든다. 저 아이가 저렇게 웃는 걸, 나는 왜 저 문 안에서만 듣는가. 저 안에는 무엇이 있길래, 밥상에도 없고 내 앞에도 없는 저 웃음이 저기에는 있는가.
엄마는 문고리를 잡았다가, 오늘은 두드리지 않는다. 대신 처음으로 궁금해진다. 저 문 안에서 내 아이는, 대체 무엇을 얻고 있는 걸까.
문 안을 함께 들여다본다.
심리학에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은 세 가지가 채워질 때 스스로 움직인다고. 첫째는 내가 고른다는 느낌, 자율성이다. 둘째는 내가 해낸다는 느낌, 유능감이다. 셋째는 누군가에게 필요하다는 느낌, 관계성이다. 이 셋이 있으면 시키지 않아도 움직이고, 없으면 아무리 다그쳐도 움직이지 않는다.
아이의 하루를 이 셋으로 나눠 보면, 답이 보인다.
학교에는 이 셋이 없다. 무엇을 배울지 아이가 고르지 못한다. 아무리 애써도 해냈다는 느낌이 오지 않는다. 아무도 아이를 찾지 않는다. 자율성도, 유능감도, 관계성도 다 비어 있다.
게임에는 이 셋이 다 있다. 어디로 갈지 아이가 고르고, 애쓴 만큼 등급이 올라 해냈다는 느낌이 오고, 길드의 여섯 사람이 아이를 찾고 기다린다. 학교가 비워 둔 셋을, 게임이 정확히 채운다.
그러니 아이가 게임으로 들어간 것은, 게을러서가 아니다.
여기서 흔한 생각 하나를 뒤집어야 한다. 사람들은 말한다. 게임은 현실 도피라고. 힘든 현실에서 달아나 게임으로 숨는 거라고. 그런데 아이는 달아난 게 아니다. 현실에 없는 것을 찾아 들어간 것이다.
도피는 없는 데로 달아나는 일이다. 그러나 아이가 한 것은 반대다. 있어야 할 것을 찾아 들어간 일이다. 인정, 보람, 자기 몫. 사람이라면 누구나 있어야 할 그것들이 현실에는 없어서, 아이는 그것이 있는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기까지가 첫 번째 겹이다. 게임은 도피가 아니라, 현실에 없는 것을 얻는 곳이었다.
그런데 한 겹이 더 있다. 더 깊고, 더 아픈 겹이다.
게임은 정직하다. 애쓴 만큼 정확히 준다. 한 시간을 들이면 한 시간만큼 오르고, 이기면 반드시 점수가 온다. 속이는 법이 없다. 문제는, 아이가 이 정직함에 길들면서 시작된다.
정확한 보답에 익숙해진 눈으로 보면, 현실은 견딜 수 없이 느리고 불확실하다. 공부는 한 달을 해도 오를지 안 오를지 모른다. 착하게 살아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애써도 보답이 온다는 보장이 없다. 게임의 정직함을 겪고 나면, 현실의 이 불확실함이 갑자기 참을 수 없어진다.
그래서 게임은 도피처에서 멈추지 않는다. 어느새 현실을 재는 잣대가 된다.
게임만큼 정확하지 않은 현실은 시시해지고, 게임만큼 빨리 답하지 않는 현실은 답답해진다. 아이는 이제 게임으로 숨는 게 아니라, 게임의 눈으로 현실을 보게 된다. 그 눈으로 보면 현실은 도무지 할 마음이 나지 않는 곳이 된다.
이것이 두 번째 겹이다. 게임이 도피처라서 무서운 게 아니라, 게임이 현실을 못 견디게 만드는 잣대가 되어서 무섭다.
한 걸음 물러서서, 어른들의 눈을 본다.
같은 아이가 게임을 해도, 어른들은 다르게 본다. 공부 잘하는 아이가 게임을 하면 "쉬는구나" 한다. 공부 못하는 아이가 똑같이 게임을 하면 "저러다 폐인 된다" 한다. 게임은 같은데, 판단이 다르다.
그렇다면 어른들이 걱정하는 것은 게임이 아니다. 성적이다. 게임을 걱정하는 척하면서, 실은 성적을 걱정한다. 그러니 '게임 중독'이라는 말은, 성적 나쁜 아이에게만 붙는 딱지일 때가 많다. 같은 행동인데 누가 하느냐에 따라 이름이 달라진다.
그럼 진짜 중독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다만 그 기준이 성적이 아닐 뿐이다.
세계보건기구는 2019년 채택된 국제질병분류 11판에 게임 이용 장애를 넣었다. 기준은 시간의 양이 아니다. 게임을 스스로 멈추지 못하고, 게임을 다른 모든 일보다 앞에 두며, 삶이 무너지는데도 계속하는 것. 쉽게 말하면, 게임을 하고도 현실로 돌아오면 괜찮고, 게임이 아니면 현실을 못 견디게 되면 문제라는 뜻이다.
이 기준으로 보면, 성적은 처음부터 상관이 없다. 공부 잘하는 아이도 스스로 멈추지 못하면 중독이고, 공부 못하는 아이도 멈출 수 있으면 중독이 아니다. 성적으로 아이를 나눠 놓고 한쪽만 중독이라 부르던 그 눈이, 애초에 틀렸다.
그리고 하나 더. 게임을 한다고 걱정하는 그 시선도, 이제는 낡았는지 모른다. 화면을 다루는 능력이 쓸모없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문제는 화면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 안에서 아이가 자기 삶을 잃고 있느냐다.
그러니 진짜 물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게임이 나쁘냐가 아니다. 왜 어떤 아이는 게임밖에 갈 곳이 없느냐다.
아이는 현실에 없는 것을 게임에서 얻었다. 그러니 아이를 게임으로 밀어 넣은 것은, 다름 아닌 현실이다. 갈 곳을 없앤 슬롯다. 그리고 그 빈 곳을, 게임을 파는 이들이 노린다. 확률 뽑기를 보라. 돈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좋은 것이 나올지 모른다는 그 설계는, 도박이 사람을 붙드는 방식과 똑같다. 도박에서 보았던 그 손이, 이번에는 아이의 빈 곳을 겨냥한다. 사다리를 치운 슬롯가, 가상의 사다리를 상품으로 판다.
이제 처음의 그 손가락질로 돌아가 보자. 아이를 현실에서 밀어낸 손과, 게임한다고 아이를 벌하는 손. 성적으로 아이를 줄 세워 갈 곳을 빼앗은 손과, 그 아이가 게임에서 자기 몫을 찾자 중독이라 단죄하는 손. 손가락질은 다르지만, 아이를 밀어낸 방향은 닮아 있다.
그러니 당신에게 말하고 싶다.
방문을 닫아걸고 게임 안으로 들어간 아이가 있다면, 그 문을 두드리기 전에 잠깐 멈춰 서기를. 그 아이는 달아난 것이 아니다. 여기에 없는 것을 찾아, 저기로 걸어 들어간 것이다. 인정받고 싶어서, 어딘가에 자기 몫이 있었으면 해서, 애쓴 만큼 돌아오는 정직한 세상이 그리워서.
그러니 물어야 할 것은 "왜 게임만 하느냐"가 아니다. "네가 여기서 받지 못한 것이 무엇이냐"다.
화면 속 사람들이 그 아이를 형이라 부를 때 당신은 그 아이를 무엇이라 불렀는지, 게임이 애쓴 만큼 돌려줄 때 당신의 세상은 그 아이에게 무엇을 돌려주었는지. 이 물음은 아이를 탓하지 않는다. 아이가 걸어 들어간 그곳이 아니라, 아이가 등지고 나온 이곳을 돌아보게 할 뿐이다.
혹시 당신도 한때, 어딘가에 자기 몫을 찾아 헤매던 아이였다면. 그 마음을 기억한다면, 저 닫힌 문 안의 아이가 조금은 다르게 보일 것이다.
그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게임을 빼앗을 손이 아니다. 이곳에도 네 몫이 있다고 말해 줄 목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