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자 E 엄마와 대문자 I 딸

by미스블루

엄마의 쉴 새 없는 수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서인지 잠이 스르르 온다.

엄마의 엘에이 방문으로 우리는 한 달간 함께 지내고 있다.

언젠가 뉴욕으로 엄마랑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엘에이에서 뉴욕까지는 비행기로 6시간 정도가 걸리는데 비행 내내 단 한 번도 닫아지지 않는 엄마의 입을 쳐다보며 사정사정을 하여 15분 정도 겨우 잠을 청하기도 했었다.


엄마의 MBTI는 완전한 대문자 E, 나는 대문자 I 다.

엄마는 옆에 사람이 없으면 금방 힘이 빠져 기운이 없어지고 나는 사람들 틈에서 에너지를 모두 빼앗겨 녹초가 되었다가 혼자 보내는 시간이 생기면 그제야 기운이 펄펄 난다.

엄마의 집은 아파트이지만 대문을 잠그지 않는 시골집처럼 많은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고(친한 사람들은 모두 엄마집 현관 비밀번호를 알고 있다) 나의 집은 약속된 날만 북적인다.

그 외엔 절간처럼 조용하다.

엄마는 이 세상에서 혼자 무언가를 먹는 일이 가장 싫고, 나는 사람이 많으면 밥숟가락을 내려놓게 된다.


어릴 적 이웃에 참기름을 짜서 팔아 용돈벌이를 하는 이웃집 할머니가 계셨다.

참기름을 팔다가 할아버지에게 들키면 혼이 난다는 말을 들은 우리 엄마는 우리 집에 할머니의 참기름을 가져다 팔아드렸고, 하루 종일 참기름을 사러 오는 사람들 덕분에 우리 식구는 밥 한 번을 편하게 앉아서 먹지를 못했었다.

참기름은 왜 그렇게들 꼭 저녁 먹는 시간에 사러 오는지..

밥 한 숟가락 먹으면 띵동! 일어나서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 앉아서 다시 한 숟가락을 먹으면 또 띵똥!

대문자 I 딸은 참기름을 파는 시간을 적어서 현관문 앞에 써 붙이고 그 시간에만 문을 열어주면 안 되냐고 통사정을 하여도 어떻게 그러니....라는 대문자 E엄마를 바라보며 말이 씨도 안 먹힌다는 뜻을 알아가며 자랐다.

그 시절 어느쯤에는 뉴욕제과에서 아주머니들에게 빵을 바구니에 담아 가지고 다니며 아파트에서 팔게 했던 적이 있었다.

아주머니들이 한번 빵을 받아오면 이삼일쯤 팔았던 것 같다.

엄마는 아주머니들에게 그 빵을 다 들고 집에 갔다가 다음날 또 어떻게 나오냐며 우리 집 베란다에 빵 바구니를 두고 다니게 했다.

우리 집 베란다에는 뉴욕제과 빵이며 아모레 화장품 아주머니들의 화장품 가방이며 참기름이며... 모든 물건이 다 있었다.

동네 젊은 새댁 엄마들이 미장원에 머리를 하러 가는 날에는 그 집 아이가 하루 종일 우리 집에 있었다.

학교 갔다 돌아오면 문구류 천지인 내 방을 홀딱 뒤집어 놀고 있는 아가들을 바라보며 울화통이 터졌었다.


시골에서 공부를 잘했던 우리 아빠는 고등학교 때 서울로 유학을 오게 되었고, 종로 한복판에 서서 얼굴이 하얀 서울여자들을 보며 굳게 결심했다고 한다.

'나는 반드시 서울여자와 결혼할 것이다.'

아빠는 꿈을 이뤘다.

우리 엄마는 얼굴이 다른 사람보다 유난히 하얀 서울 토박이 여자였다.

아빠는 얼굴이 하얀 서울여자를 데리고 결혼할 상대라며 시골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었고 온몸이 새하얀 서울여자를 데리고 온 집안의 기둥인 장남을 보며 우리 조부모님은 너무 놀라 벌벌 떨며 엄마에게 한마디만 물어보셨다고 한다.

'밥은 할 줄 아냐고...'

그때는 여자가 밥만 할 줄 알면 되는 시대였으니..

대학에서 가정학과를 다닌 엄마를 두둔하며 아빠는 어깨가 으쓱해 대답했다고 한다.

'그게 이 사람 전공입니다.'

아빠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엄마가 대문자 E라는 것을 진즉 파악했던 것이다.

결혼을 하고 나니 할아버지는 아빠의 동생 넷을 서울 장남집으로 보내 아들들은 대학을, 딸들은 학원을 다니게 했다.

그리고 아빠는 잦은 출장으로 집을 많이 비웠다.

대문자 E 우리 엄마는 아빠의 동생들로 북적이는 집이 오히려 좋았다고 한다.

사람이 많아서 너무 재미가 있었다고 한다.

엄마는 서울이 처음인 시동생들과 시누이들을 데리고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여주고 명동을 쏘다니며 놀았다.

시골에서는 자식들을 더러 서울의 장남집으로 보낸 집들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형수가 구박을 하고 싫은 티를 팍팍 낸다며 한숨이 꺼지지 않는 집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우리 조부모님은 머리 좋은 장남이 데리고 온 대문자 E 큰며느리 덕분에 마음을 푹 놓고 남은 자식들을 모두 서울에서 공부시킬 수 있었다.

아빠는 엄마에게 동생들로 인한 불평은 한마디도 들어보지 못했다.

동생넷을 무사히 서울에서 시집장가를 보냈다.

우리 아빠처럼 이렇게 완벽하게 꿈을 이룬 사람도 드물다고 생각한다.


대문자 I 딸은 타고난 낙천주의자인 대문자 E엄마가 친구처럼 편안하고 좋지만 맞지 않는 성향으로 힘이 들 때가 많았고 지금도 가끔 그렇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혼자서 지내는 대문자 E엄마가 혼자서는 밥이 먹기 싫다며 식사를 대충 하거나 사람만 찾아대는 통에 대문자 I 딸은 이해가 안 돼서 목이 터져라 잔소리를 하다가 뻗어버릴 지경이다.

사람은 원래 혼자야.. 혼자서도 있을 줄을 알아야지... 같은 소리를 늘어놓지만 마음 한구석은 옆에 있어주지 못해 속이 상해서 그런다.

오랜만에 방문한 딸 집에서 딸과 함께 24시간 함께 있으니 신이 난 대문자 E 엄마의 수다에 대문자 I 딸은 누군가 계속해서 뺨을 치는 것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그리고 그중에 70퍼센트 이상은 이미 한번 들었던 이야기다.

대문자 I 딸은 대문자 E 엄마를 가만히 바라본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대문자 E 엄마의 이야기는 사실 딱히 누군가에게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생하게 꺼내놓는 엄마의 모든 기억들은 엄마 스스로 삶을 정리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 그렇지.. 그러네... 그렇겠지... 중간중간 추임새를 넣으며 대문자 I딸은 혼미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고 있다.

언젠가는 듣고 싶어도 더는 들을 수 없는 목소리라는 생각에...


한 여자의 일생을 보았다.

기억을 할 수 있는 나이부터 보니, 모두는 아니지만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골에서 올라온 촌티 나는 남자에게 자신의 강아지인 프랭크 이야기를 명랑 쾌활하게 들려주며 삶의 어두움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던 새하얀 서울여자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 시골남자와 결혼했다.

아무리 쾌활한 사람이라고 해도 왜 어렵고 힘들지 않았을까....

집안의 반대를 이기고 한 결혼이기 때문에 힘들다는 소리는 친정집에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저 자신이 선택한 삶에 최선을 다하며 그 특유의 명랑 쾌활함은 잃지 않으려 혼신의 힘을 다했던 것 같다.

사랑했던 그 남자가 먼저 떠나고 혼자 남겨진 서울여자는 혼자 사는 삶이 낯설고 힘들지만 울지 않으려 갖은 노력을 다한다고 한다.

오래 아팠던 남편의 장례를 모두 치르고 탈진이 되어 침대에 누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을 못하고 사경을 헤매고 있으니 혼령이 된 남편이 찾아와 침대옆에 앉아 마지막 말을 해주었다고 한다.

'참 예쁘다..'

새하얀 서울여자를 떠나며 시골남자는 이 말을 남겼다.

꿈을 이룬 남자의 마지막 말이었다.


대문자 E 엄마의 일생을 안아주고 싶다.

그 시골남자가 아니라 외할머니가 편안하게 살게 해 주려 정해 놓았던 혼처로 시집을 갔으면 엄마의 일생은 더 행복했을까?

엄마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어 가고 있다는 것을 엄마의 연약해진 몸짓에서 매일 느낀다.

파파 할머니가 되어도 아빠가 해준 농담을 기억하며 해맑게 웃고 있는 엄마를 바라본다.

톨스토이의 말이 생각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의 일생은 수학적으로 계산될 수 없는 무엇인가가 반드시 있는 것 같다.

그게 무엇인지는 나도 모른다.

그저 대문자 E 엄마가 아직도 대문자 E 성향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 다행이다 싶기는 하다.

인생의 어떤 굴곡도 그녀의 튼튼한 대문자 E에 손가락 하나도 건드리지 못했으니...

그거면 됐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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