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두를.. 초록을 먹다.

by미스블루

엘에이의 흐린 날이 좋다.

운치가 있다.

햇빛 쩅한날의 야자수도 좋지만 야자수와 전혀 안 어울리는 회색 배경의 야자수도 멋지다.

어쩌다 야자수가 비를 철철 맞고 있는 귀한장면을 볼 때가 있다.

그 굵은 몸똥이의 먼지가 씻겨 내려가며 부챗살처럼 생긴 야자수 이파리들의 사이사이로 물이 주룩주룩 흐른다.

우리 집 창문 앞의 위치한, 잎이 무거워진 야자수가 나의 집 창문을 퉁퉁 친다.

불쌍한 나의 창문은 거인의 거대한 부채에 계속해서 싸대기를 맞으며 눈을 질끈 감고 참고 있다.

나는 그 광경을 경이롭게 바라본다.


날씨는 흐리지만 오늘은 모처럼 몸도 마음도 가뿐한 느낌이다.

신경 쓰고 있는 일로 인하여 배도 아프고 머리도 지끈거려 며칠 독한 약을 달고 살았다.

신경 쓰고 있던 일들의 앞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하자 몸은 귀신같이 알아채고 말끔해졌다.

밥맛도 없었는데 식욕이 나기 시작했다.

뭘 먹으면 이 개운한 기분이 쭉 연결이 될까?

마음 덕분에 괜히 고생한 몸에게 좋은 것으로 보상을 해주고 싶었다.

며칠 전 코스코에서 배달시킨 아보카도가 잘 익어 윤기 나는 검은빛을 띠며 싱크대에서 뒹굴거리고 있다.

그래 아보카도 토스트다.

아보카도 토스트는 각자의 취향에 따라 아보카도에 달걀 프라이도 올려먹고 토마토도 올려 먹지만 나는 그냥 순 아보카도만 올려 먹는 것을 좋아한다.

아보카도 토스트는 빵을 잘 골라야 한다.

우리 집 냉동고에는 빵이 종류별로 있다.

매일 샌드위치로 남편씨의 점심 도시락을 준비하기 때문에 (냄새가 나는 음식은 가져갈 수가 없으니..) 질릴까 봐 빵을 종류별로 구비해 두고 매일 다른 샌드위치를 싼다.

훈제연어 샌드위치는 크라상에, 햄과 치즈 샌드위치는 9가지 잡곡이 섞인 호밀빵에, 바질 페스토에 하바타 치즈를 녹여낸 샌드위치는 바케트를 이용한다. 그리고 남편씨가 제일 좋아하는 피넛버터 앤 젤리 샌드위치는 호두가 송송이 박힌 두꺼운 토스트빵을 선택한다.

아보카도 토스트는 단맛이 전혀 나지 않는 거친 질감이 나는 사워도우를 사용해야 맛나다.

부드러움과 거침이 만나면 환상의 조합을 만들어 낸다.

보드라운 남자들이 테토녀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이 이런 건가?

먼저 예닐곱 개의 아보카도 중 색깔이 가장 검게 변한 놈으로 고른다.

나머지는 냉장고에 넣어 더 이상 후숙이 되지 않도록 '후숙 화석화'를 시킨다.

오늘 잡는 아보카도 녀석의 배를 쩍 가른다.

연둣빛 속살과 반질반질 윤이 나는 아보카도 씨앗이 눈앞에 펼쳐진다.

한치의 자비도 없이 씨앗에 칼을 꽂아 옆으로 돌리니 씨앗은 칼날에 머리끄덩이가 잡혀 아보카도의 속살과 분리된다.

니스를 칠해 놓은 것처럼.. 광나는 고급스러운 마룻바닥처럼 윤기가 나는 아보카도 씨앗을 버리기가 아까워 잠시 바라본다.

정말 멋들어진 브라운 색깔이다.

작은 볼을 하나 놓고 잘 익어 얇아진 아보카도 껍질에서 연두색 속살을 숟가락으로 긁어낸다.

이건 연두부냐 뭐냐.. 왜 이리 부드럽냐..

말끔하게 긁어서 볼에 담긴 아보카도의 속살을 숟가락으로 으깬다.

형태가 금방 사라진 아보카도의 질감은 물을 많이 섞지 않아 두껍게 발라질 연둣빛 물감처럼 되어 버렸다.

캔버스에 칠하면 그 색깔 그대로 묻어 나오는 그런 색 말이다.

토스트기에 사워도우를 넣고 알맞게 굽는다.

너무 바삭하지도 너무 눅진하지도 않게.. 딱 알맞게..

너무 많이 이용해서 열이 받을 대로 받은 토스터기는 빵 가져가라며 소락대기를 지르고 놀란 나는 허겁지겁 뜨거운 사워도우 빵을 꺼내 접시에 담는다.

아! 빵이 접시에 철퍼덕 닿아 바삭함을 잃어가며 죽어갈까 봐 돈가스용 작은 철망을 접시 위에 올리고 그 위에 사워도우를 살포시 눕힌다.

이제 연둣빛 물감을 바를 차례다.

잘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다.

어쩌다 시험공부를 많이 하고 시험을 볼 때 더 떨리지 않은가. 시험을 잘 보고 싶어서..

공부를 안 하고 시험을 보면 떨리지도 않는다.ㅋㅋㅋ

스프레드용 작은 나이프로 연둣빛 물감을 듬뿍 떠낸다.

본격적으로 바를 때는 또 용기를 내야 한다.

조심조심하면 안 된다.

사정없이 바른다.

기인의 기질이 있어 대걸레로 쓱쓱 물감을 칠하는 화백처럼 말이다.

더 이상 아보카도가 올라갈 자리가 없을 때까지 바르고 난 후 올리브오일을 가져와 철철 뿌려준다.

기름은 철망을 타고 접시 밑으로 흘러내린다.

풍요롭다.

여기까지가 기인이다.

다음은 곱디고운 금 손을 가진 에겐남 이다.

말돈 소금을 살짝 집어 올리브오일로 범벅이 된 아보카도 토스트 위에 솔솔 뿌린다.

말돈소금은 입자가 굵기 때문에 한 곳에 모여 있으면 짜서 몸서리를 칠 수도 있다.

섬세하고 섬세하게 소금 한알씩..

일정하지만 불규칙한 간격으로 마치 하늘의 별의 위치를 정해주듯이 그렇게..

컨트리풍의 접시에 완성된 아보카도 샌드위치를 담고 물감으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연두색을 잠시 바라본다.

그리고 한입 가득 베물어 먹는다.

크림과 같은 아보카도가 입안을 가득 채우며 별사탕 같은 말돈 소금의 적당한 짠기가 톡톡 터진다.

한입 두 입.. 아보카도의 그 부드러움에 멱살을 잡혀 무아지경으로 더 빠르게 자꾸자꾸 베물어 먹다 보니 접시에는 흘러넘친 올리브오일만 남았다.


완벽한 하루를 만들기에 손색이 없는 식사였다.

연두를.. 초록을 먹고 나도 초식동물의 그 순한 마음을 닮아 하루를 산다.

괜히 오늘은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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