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잔

by미스블루

언젠가 배우 최민수 씨가 집사부일체라는 예능 프로그램에 나온 적이 있다.

최민수 씨는 일일 사부가 되어 '선택의 두려움'이라는 뜨거운 감자에 대한 가르침을 주기로 했다.

제작진은 두개의 잔을 마련한다.

한잔은 녹차, 한잔은 소금으로 진하게 간을 한 소태차를 준비한다. (둘다 색깔이 같다.)

멤버들에게 어떤 잔이 녹차인지 어떤 잔이 소태차인지 고민 끝에 고르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최민수 씨는 세개의 잔을 준비하여 세개의 잔 모두를 소태차로 만들었다. (역시 색깔은 모두 같다.)

멤버들은 두려움에 떨며 자신이 선택한 잔이 제발 녹차잔 이기를 바랐지만 모두 소태차였으니 열심히 골라봤자 모두 소태차를 마시게 되었다.

소태차를 마시게 된 멤버들은 혓바닥이 길게 나오고 오만상을 찌푸리며 괴로워했다.

그때 최민수 씨는 앞에 앉은 이승기 씨에게 말했다.

이 게임은 원래 둘이서 하려던 거다.

둘 앞에 세 개의 잔이 있다.

세잔은 모두 소태잔이다.

나는 당연히 소태잔을 마시고 나서 녹차를 마신 것처럼 태연한 얼굴을 하려고 했다.

너도 당연히 소태잔을 마실 것이고, 너는 내가 마신잔이 소태였는지 녹차였는지 모르는 상태고, 그러면 마지막 한잔이 남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말한다.

'한잔 남았는데 또 해볼래?'

이건 무슨 뜻이냐면.. 보통 이런 게임은 항상 두 잔으로 한다. 한잔은 소태잔, 한잔은 녹차잔

그런데... 왜 인생은 늘 이분법이어야 하느냐..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또 한 잔이 있다.

두 잔이 끝나면 너는 내가 소태를 마셨는지 녹차를 마셨는지 모른다.

이처럼 세상은 너에게 표정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잔이 남아있다.

너는 머릿속에서 생각할 것이다.

저게 녹차일까 소태잔일까..(최민수 씨가 소태잔을 마시고도 태연한 척했으니..)

그런데 확률은 더 작아진다.(용기를 내라는 뜻이다)

다른 선택을 할 때는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버려야 할 때는 미련을 갖지 마라.

그래야 선택이 깔끔하다.

너의 선택에 자꾸 미련을 가지면 너는 평생 어떤 선택을 하더라고 후회할 것이고 너다운 선택을 하기가 힘들 것이다.


나는 소심한 사람이다.

누군가 나에게 너는 인생을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니라고 물어보면 나는 내가 한 모든 선택에서 최대한 후회하지 않으려 몸부림을 치며 살고 있다고 대답할 것 같다.

그저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살고 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후회하고 있다고..

후회하느라 밤을 지새우고 내 마음을 때리고 벌주고 그것도 모자라 이게 다 너때문이라며 옆에 사람에게 눈을 흘긴다고..

두려움에 덜덜 떨며 인생의 패를 고르고, 갈래길에 서서 고심 끝에 선택한 길을 가다가도 뒤를 돌아보느라 제시간에 목적지에 도달하지도 못하는..

소심하고 소심한 한심하고 가여운 인간이 나라고..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라는 바카라이 있다.

동화작가였던 저자는 어른에게 들려주는 어른 동화로 우리에게 마음의 울림을 주었다.(혹시 아직 안 읽어보신 분들을 위해 스포는 최대한 삼가하겠습니다.)

밤 12시에만 열리는 나만의 도서관에 내가 하지 않은 수많은 선택지에 관한 바카라이 산처럼 쌓여있다.

주인공은 그 바카라들을 읽기 시작한다.

작가가 주는 메세지는 이런 것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잘 안 풀려 그때 이 선택이 아니라 저 선택을 했더라면 분명히 성공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자기 자신을 고문하지 않기를...

그때 그 선택을 했으면 꼭 잘됐으리라는 사실은 어디에도 없는 나만의 상상일 뿐이라고

그러니 현재를.. 현재를... 충실히.. 뒤 돌아보지 말고.. 가장 아름답게 살라고...

사느라 허덕이는 우리 어른들에게 미드나잇에 자신만의 도서관을 열어주며 자 보라고.. 지금 너의 선택이 그리 틀리지 않았으니 힘을 내라고..

작가는 그렇게 우리를 위로해 주고 토닥여 준다.


내가 좋아하는 김창욱 강사님이 어느 강연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왜 자동차에 앞유리는 크고 백미러는 작은 줄 아느냐고..

과거는 되도록 작게 보고 현재는 크게 보면서 앞으로 쭉쭉 뻗어 나가라고.. 그렇게 만든 거라고

그만 뒤돌아보라고..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는 일들에 좌절하며 자꾸 뒤를 돌아보는 나에게..

아이들과 남편과 내 일들에 얽매여 내가 하게 된 선택들 앞에서 무릎을 꿇어버린 내게 조용히 다가와 보내주는 메세지들..

괜찮다고.. 일어나라고..

선택에 잘못된 건 하나도 없었다고..

마지막잔이 남아 있으니 힘과 용기를 내라고..

그리고 지금 이 시간을 살아내라고..

최대한 기쁘고 즐겁게..


오랜만에 마당에서 봄비를 가득 머금은 장미꽃을 한 아름 따다가 소박한 화병에 꽂아 식탁 위에 올려두고 바라보며 이 글을 쓴다.

내 앞에는 내가 했던 수많은 선택들이 내 눈치를 보느라 벌벌 떨며 서있다.

자신들이 성공적으로 완수하지 못한 과제들을 들고 얼굴을 들지 못한 채...

나는 내 선택들을 가만히 쳐다보다 천천히 쑥스러워하며 두 팔을 벌린다.

눈치를 보던 그들이 쭈뼛거리며 달려와 나에게 안긴다.

그리고 우리는 가만히 그렇게 오래 있는다.

녀석들은 미안하다고 조용히 말하고 나는 괜찮다고 다 이해한다고 말한다.

그동안 내게 그렇게나 미움을 받고서도 금방 맑은 얼굴을 보여 주는 착하고 착한 순댕이 녀석들…


주섬주섬 일어나 우리는 서로 손을 맞잡는다.

그리고 나는 말한다.

아까 마신잔이 소태였다며 세 번째 잔에 내 온 인생을 걸지 않겠다고..

또 아까 마신잔이 운이 좋게 녹차였어도 그 잔을 마시기 전 아무것도 아니었던 나를 잊지 않겠다고..

이 세상에 두 개의 잔만이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나를 몰아붙이지 않겠다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 앞에 놓인 장미를 바라보는 이 시간과 나 다움을 간직하는 거라고..

그렇게 꺾인 무릎을 펴며 말할 것이다.

자 이제 세 번째 잔을 마시러 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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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행복을 들어 교만하지 말고 지금의 불행을 들어 비관할 필요 또한 없다.

잘 살다가 잘 죽자.

늘 겸허하자.

함부로 결론을 내리지 말라.

인생은 예측할 수 없으니까..

<허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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