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줘요….”
라인 구석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테스트 라인에는 2미터 높이의 장비 100여 대가 오와 열을 맞춰 서 있다. 생산부 장비보다 작고 단순한 직사각형 장비들 뒤에 PC가 한 대씩 붙어, 거대한 서버와 개인용 PC가 연결된 모습이다. 특이하게 자재를 옮겨 주는 운송 장치가 없다. 현장 여사원들이 카트로 직접 나른다. 빵모자에 흰 가운, 흰 바지. 나도 그렇게 입고 있다. 생산부보다 훨씬 평화롭고 편안한 풍경이다.
목소리를 따라가 보니 현진영 대리가 혼자 바닥에 앉아 제품을 산처럼 쌓아 놓고 정리하고 있었다. 팔봉이인 줄 알고 장난친 건데 오신 김에 도와 달라는 것이다. 이들의 장난은 이런 것인가 보다. 라인 맨바닥에 앉는 게 불편했지만 그도 이미 앉아 버린 상태라 마음을 비우고 앉았다. 현진영은 팀에서 소문난 일 중독자다. 스스로를 멍청하다고 말하며 단점을 시간으로 극복하려는 나쁜 습관이 있다. 늘 머리를 긁적여서인지 30대 초반에 벌써 탈모가 심하다.
그가 만지고 있는 것이 완제품이었다. 손톱만 한 검은 사각형, 신경칩이다. 생산부에서 만들던 인공신경 원자재가 손톱보다 작게 잘려 그 안에 들어가 있다. 로봇의 몸 곳곳에 박혀 감각과 반사를 처리하는 부품. 원자재를 신경칩으로 만드는 곳이 제품 그룹이고, 만들어진 칩을 테스트하는 곳이 여기 테스트 그룹이다. 완성된 로봇을 도크에 앉혀 놓고 버튼을 누르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로봇은 여기 없다. 로봇의 신경만, 달걀 트레이를 닮은 완제품 트레이에 열 개씩 담겨 탑처럼 쌓여 있을 뿐이다.
지금 만지는 칩은 모두 불량품이었다. 불량이 트레이마다 한두 개씩 흩어져 있어서, 그것을 손으로 합치는 작업이었다. 참으로 무식한 일이다. 자동으로 합쳐 주는 장비가 없냐고 묻자, 있긴 한데 아무도 써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제조팀에 장비를 빌리고 사용법을 배워야 하는 게 번거로워서, 인형 눈알 붙이듯 세월아 네월아 손으로 한다는 것이다. 사람 손을 대신할 로봇을 만드는 회사에서, 사람들이 손으로 로봇의 신경을 고르고 있었다. 이날 이후로 트레이 합치기를 수도 없이 했다.
대부분 현진영 대리와 했고 어떤 날은 김팔봉 사원과 했다. 김팔봉과는 마음이 잘 맞아 금방 친해졌다. 밤식빵처럼 선 굵은 인상이라 다가가기 어려워 보였는데, 겪어 보니 카스테라처럼 부드러운 후배였다. 게다가 적당히 요령을 부리고 싶어 하는 후배였다. 안 되겠다, 장비 빌려서 해 보자는 내 말에 그는 답했다. 저는 선배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가끔 그의 대답은 우리가 만드는 로봇 같다.
제조팀은 생각보다 흔쾌히 장비를 내주었다. 생산부 장비에 비하면 쉬운 물건이었다. 트레이를 올리고 실행 버튼을 누르자 로봇 핸들러가 빠른 속도로 제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커피 한잔하고 오면 끝나 있겠는데? 와우, 멋져요.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서로의 본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는 생산부에서 벌어지는 일을 상상도 못 했고, 나도 테스트 그룹의 일을 상상도 못 했었다. 두 본부는 그냥 다른 회사라고 봐도 될 만큼 다른 문화와 다른 업무를 갖고 있었다.
그때 김팔봉의 전화가 울렸다. 또 올 게 왔다는 말투로 전화를 끊은 그가 말했다. 부천공장 고객만족팀에서 RMA를 보냈다고, 오늘까지 돌려야 한다고, 일찍 퇴근하고 싶었는데 망했다고.
RMA는 제품 반송 승인이다. 고객에게 이미 판매한 제품의 불량을 무상으로 확인해 주는 것. 고객에게는 당연한 권리다. 문제는 김팔봉이 맡은 제품의 보증기간이 10년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입사하기 수년 전 제품의 불량 원인까지 찾아서 검증해야 한다. 영업부가 10년 전에 그렇게 계약해 버린 바람에 생긴, 탐탁지 않은 업무다.
그가 구형 제품 하나를 들고 왔다. RMA는 반환시간이 하루라 되도록 당일에 테스트를 돌려야 한다고 했다. 이번 제품은 게임회사 하나모리에서 온 것이다. 이백 살이 넘은 회사다. 게임기는 조작 반응만 처리하면 되니 최신 신경칩까지는 필요 없어서, 이렇게 오래된 칩으로 원가를 아낀다고 한다. 저온 장비와 고온 장비에 하나씩 넣어 두 온도를 모두 보증해야 한다. 그는 제품을 넣고 무서운 속도로 타이핑을 하더니 시작 버튼을 눌렀다.
불량이 재현되면 소자팀으로 보내고, 재현이 안 되면 끝이다. 대부분은 재현이 안 된다고 한다. 전자제품에는 부품이 워낙 많아 고객 쪽에서 다른 부품이 말썽이었을 수 있다. 그리고 드물지만, 불량 현상이 저절로 사라지는 일도 있다고 한다. 업계에서는 그것을 제품이 스스로 힐링되었다고 부른다. 사실 바쁘거나 귀찮을 때는 테스트도 안 해 보고 재현 안 됨으로 종료할 때도 있다는 것은 안 비밀이라고, 그는 농담 반 비밀 반으로 덧붙였다.
며칠 뒤 변진섭 차장이 우리 둘을 불렀다. 팔봉이가 일이 몰리니 업무를 나누자는 것이다. 철수 이제 RMA 정도는 혼자 잘한다며? 그렇게 RMA는 내게 넘어왔고, 김팔봉은 신제품 설정에 집중하게 되었다.
신제품 설정은 듣기로 지저분한 업무다. 테스트 장비는 보통 한 번에 열 개를 테스트하는데, 그것을 스무 개로 늘리는 작업이다. 테스트 시간은 1.3배에서 1.5배 늘지만 장비 하나로 두 배를 돌리니 제조팀이 좋아한다. 처음에는 누군가 한번 해 본 아이디어였는데, 이제는 신제품이 들어오면 당연히 해야 하는 절차가 되었다. 버튼 하나 누르는 설정이 아니다. 수천, 수만 줄의 코드를 해석하며 한 달, 두 달, 길면 석 달을 한 땀 한 땀 코딩해야 한다. 검증을 아무리 해도 사고가 난 적이 있다. 불량을 정상으로, 정상을 불량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일도 아니다. 그래서 검증이 까다로워졌고, 마지막에는 품질보증팀의 허가까지 받아야 한다. 제조팀은 마냥 기다려 주지 않는다. 두 달이 넘으면 눈치를 받고 석 달이 되면 욕을 먹는다.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거절해 봐야 거절당할 것도 뻔했다. 꼼짝없이 RMA 전담이 되었다. 10년 보증은 무섭다. 로봇 업계는 매년 변한다. 과장하면 6개월마다 변한다. 상반기 제품 개발팀과 하반기 제품 개발팀이 따로 있어서 1월에 신제품을 받고 7월에 또 받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뒤처진다. 세계 최고의 자리를 지키는 비결이다. 그러니 10년 전 제품은 골동품이다. 대부분 단종되었고, 양산 중이어도 최소한만 만든다. 생산 중이면 그나마 쉽다. 아니라면 아무도 찾지 않아 먼지 쌓인 보드와 소켓을 창고에서 빼 와야 하고, 그것도 제조팀에 부탁해야 한다. 그들의 생산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오히려 마이너스인 일이다.
그래도 얻는 것과 배우는 것이 있다. 그 긍정적인 면을 생각하기로 했다. 누군가는 누군가의 똥을 치워야 한다.
RMA는 전화나 메신저로 시작된다. 이번에는 소노다인에서 왔다는 고객만족팀의 연락이었다. 소노다인은 시장을 주름잡다가 시장의 방향을 외면한 채 품질만 고집해 사용자들에게 외면당했지만, 단골을 확보해 둔 기업 거래로 아직도 꾸역꾸역 유지되고 있다. 금성전자의 모든 사원이 소노다인 모니터를 쓰고 있으니, 서로가 서로의 고객이다.
제품이 오는 날은 꼭 금요일이다. 사용자들이 꼭 주말을 앞두고 접수한다고 한다. RMA를 전담하고부터 금요일의 정시 퇴근은 포기한 지 오래다. 여차하면 김팔봉처럼 테스트도 안 해 보고 재현 안 됨 처리를 하고 싶다. 불량품을 재현시키려다 내가 불량배가 될 것 같은 금요일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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