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채로 알 수 없이 살았다.
[아, 나도 누군가에게 뭔가를 퍼주고 싶어 안달하고, 좋아하고, 사랑하는 에너지를 동력 삼아 살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의 나는 그가 주는 온기를 기쁘게 받으면서도, 그만큼의 온기를 되돌려줄 ‘연료’가 없다.
연료를 태워 감정의 해일을 만드느니, 차갑게 식은 채 무탈하게 이 관계를 유지하는 쪽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는 쪽으로 생각하면서.
오히려 기운이 없기 때문에 계속 보고만 있다.
늘 동경하고 멋있어하던 작가들의 태도를 구사하면서.
반려에게 처음 반했던 모습도 비슷한 모습이었다.
커피숍에 앉아 아메리카노 한 잔을 앞에 두고 다리를 꼬고 앉아 너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바카라을 보고 있던. 내가 그런 모습이 되어 있었다.
이대로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우울하지만 우아하게.
별 감정 없지만, 슬롯적 인간으로 살기는 편하니까.
하지만 그저 그때뿐, 낫지는 않고 그냥 그 순간 누르는 게 다였다.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약을 계속 바꿔봐도 그저 그 날 그날의 면피일 뿐인 것이 문제였다. 살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무기력은 나아지지 않았다.
진료 세부 내역서를 보니 '마약류 관리' 항목이 보였다. '치료'라는 말. 의사선생님의 '목적'에는 맞게 '치료' 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의사'를 두고 '취향'이라는 말을 쓴다는 것이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으나, 사실 아주 사무적이고 표정없이 건조한, 매사에 나에게 딱히 관심 없어 보이는 현재의 의사선생님은 솔직히 내 취향은 아니었다. 하지만 의사선생님이니까 말씀하신대로 따랐을 뿐이었다.
나는 말 잘듣는 환자인데, 선생님 말을 이렇게나 잘 듣는데, 왜, 그대로일까.
여전히 무기력은 나아지지 않았다.
심리검사를 받아보기로 했다. 솔직히 지금 상태도 이렇고, 재치료 이전에도 우울증 치료를 몇 년을 했었다보니 가진 돈도, 버는 돈도 많지 않다. 몇 번을 고민했다. 그러다 용기 내서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하고 받은 얇은 소견서의 내용은,
...이상했다.
Persistent Depressive Disorder
지속성 우울장애
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
경계성 성격장애
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 combined presentation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혼합형)
이게... 뭐야?
나.... 뭐지...?
ADHD 의심은 했다지만 진짜였다니.
의외였던 건 경계선 성격장애가 ADHD보다 앞 순위라는 거였다.
의사 선생님이 저 보고서를 잡고 내게 설명을 해주긴 했다. 분명 선생님의 입은 움직였고, 내 귀에 목소리는 들렸다. 하지만 멍하니 보고서만 내려다봤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이게... 무슨 뜻인데...?
결국 내가 못 알아들은 것이다. 선생님이 설명을 해줬는데 내가 멍청해서 이해를 못 한 걸 수도 있다. 그 와중에 제일 크게 든 생각은 '생각보다 나 멍청하네' 같은 거였다.
아, 그래서 이렇게 아무것도 못 됐나.
내가 그럼 그렇지 뭐.
그런 식의 자괴감이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한 번도 다른 게 나온 적 없는 ENFP였다. 잘 모르던 누구도 조금만 날 보고 있으면 딱 맞췄던. 그렇게 불리던 내가 약을 먹으며 ISTJ 같다는 소리를 듣는다. 아니, 사실은 누구도 가까이하지 않았기에 그저 내 상태를 들키지 않았을 뿐인 걸까. 누구도 가까이하지 않았기에 유지되었던 가면들이었나.
혼란스럽다.
이 특성은 질환이고,
저 특징은 장애라면,
나는 뭐야?
나는 뭐지?
나는... 없나?
한 번도 다르게 나온적이 없기에, 그래도 나를 설명하는 단어인가보다 하고 믿었던 [ENFP]라는 데이터는 이제 내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약을 먹으며 ISTJ처럼 연명하는 지금의 모습이 내 본질인 것도 아니다. 성격이라 믿었던 것들은 '증상'의 칸으로 밀려났고, 진단명들은 나라는 존재를 담기엔 너무 앙상하다.
<심리 평가 보고서> 속, 나를 설명한다는 단어들은 무성한데 정작 그 단어들 중 어디에도 나는 없었다.
나를 규정하는 그 어떤 체계 안에도 '나'라는 실체는 없고, 증발해버린 것만 같았다.
이 모든 정의를 다 떼어내고 나면 나는 있나?
아니... 없나?
우울의 끝자락, 마리아나 해구의 가장 깊은 바닥에서 내가 마주한 것은
나라는 고유한 알맹이가 증발해버린 텅 빈 보고서였다.
나라는 존재는 정말 있는 건가.
아무것도 없어서, 나는 여태껏 아무것도 되지 못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