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상으로 번역된 기억들

정지된 나, 백지의 이유

by는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며칠이 증발해 있었다.


평소 나는 일기를 꼬박꼬박 쓰던 사람도 아니었다.

솔직히 무언가 대단한 목적이 있어 기록을 시작한 것도 아니었고.....

그저 중증 우울증을 앓았던 3년의 시간을 지나오며, 뭐라도 남겨야겠다 싶어 시작했을 뿐이었었다.


슬롯적으로 환영받는 ‘안온한 우울’의 상태에 나름대로 만족하며,

그 질서 안에서 무탈하게 살아가던 참이었다.


나름대로 무탈하고

나름대로 우아하게.











그런데 그 소견서를 받아 든 날 이후, 나의 모든 기록은 정지했다.

한 달을 훌쩍 넘겨 펼쳐본 일기장은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차가운 백지였다. 기록하려던 의지가 꺾인 게 아니었다. 기록이라는 행위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을 만큼, 나의 뇌는 ‘과거’라는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를 전수 조사하느라 과부하 상태였다.


멍하니 앉아 과거의 조각들을 하나씩 꺼내서

증상들과 대조하고 맞춰보았다.


학창 시절, 이유도 모른 채 겪어야 했던 따돌림의 기억.

내가 부족해서 당한 줄 알고 평생을 자바카라했는데, 그것이 실은 ‘경계선 성격장애’라는 비정한 매뉴얼의 일부였을까. 좋아했던 사람들을 단점 하나 없는 신처럼 떠받들던 우상화의 시간들조차 내가 순수해서가 아니라, ADHD가 만들어낸 뇌의 현상이었던 걸까.


내가 원래 그런 인간이라서, 혹은 내 성격이 유별나서 길길이 날뛰며 스스로를 혐오했던 수많은 밤. 그 지독한 자기비하와 무기력이 사실은 내 본성이 아니라 ‘지속성 우울장애’가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결과였다면.


나는 나 자신을 한 번도 서사의 주인공으로 본 적이 없었다. 나의 불행은 서사가 되기엔 너무 흔하고 가벼웠고, 나라는 인물은 주인공이 되기엔 진중함도 재능도 모자랐다. 나를 모델로 썼던 글들이 번번이 외면받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 흔한 불행들조차 내 것이 아니라고 한다. 평생을 공들여 앓아온 내 고유한 상처들이 ‘증상’이라는 카테고리 속으로 무력하게 분류되어 버렸다. 내가 나라고 믿으며 쏟아부었던 그 비참한 감정들은 주인을 잃고 병명이라는 차가운 언어로 번역되었다.
















이거는 이거 때문이고, 저거는 저거 때문이라면.
이 모든 인과관계를 병명에게 넘겨주고 나면.
남겨진 나는 도대체 뭘까.


분석은 정교해졌지만,

정작 ‘나’라는 실체는 더 희미해졌다.


종이 위에는 여전히 한 글자도 적을 수 없었다.

내 고통이 나만의 아픔이 아니라 정해진 증상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나는 기록할 동력을 잃었다.









아무것도 없어서,

나는 여태껏 아무것도 되지 못했나 보다.


그런 채로, 알 수 없는 시간은

다시 흘러가고 있었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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