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의 오후

byHenry


은퇴 후의 시간. 그리 낯설지는 않다. 다만 소속이 없는 탓에 긴장감도 없다. 스스로 규율을 정해 두지 않으면 게을러지기 쉽다. 사람들은 자유를 갈망하지만 정작 자유를 즐길 줄 모른다. 사람은 결국 어딘가에 속해야 평온을 느낀다.


그래서 나도 슬롯를 떠나지 않는다. 일주일에 이틀, 목요일과 금요일은 대구로 간다. 그곳에 있는 대학에서 강의한다. 강의 준비가 주는 의무감, 그 긴장감이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한다. 몰입하다 보면 시간이 언제 흘렀는지도 모른다.


봄은 남도를 따라 올라오고, 가을은 태백산맥을 따라 내려온다. 올봄도 어김없이 남녘에서 시작했다. 강의를 마치고 대학이 있는 도시를 걸었다. 차를 타지 않았다. 온몸으로 봄볕을 맞고 싶었다.


도시 한복판에는 잘 정비된 하천이 있다. 천변 잔디밭 사잇길을 따라 군데군데 벤치가 놓였다. 유모차에 실린 아기의 얼굴이 봄 햇살에 화사하다. 사람들은 느긋한 발걸음으로 그리 길지 않을 봄을 즐긴다. 나는 그들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잠시, 이 도시 사람인 척.


하천을 따라 벚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두 줄로 늘어선 키 큰 근위병들이 칼을 마주하듯, 벚나무들이 터널을 이루었다. 만개한 벚꽃잎들이 봄바람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제 먼저 떨어진다. 우수수 떨어지는 하얀 꽃잎은 철 늦은 4월의 함박눈이다.


"저렇게 떨어지는 꽃잎을 보면 마음이 설레다 못해 끝내 아려와.“


떨어지는 꽃잎을 보고 친구에게 말했다. 친구가 마뜩잖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병원에 한 번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일편화비감각춘(一片花飛減却春) — 한 조각씩 꽃잎 날려 봄은 그만큼 깎여 사라지고

풍표만점정수인(風飄萬點正愁人) — 바람이 만 개의 꽃잎을 떨구니 못내 시름겹구나


두보의 시 「곡강이수(曲江二首)」 중 첫 번째 시의 첫 두 구절이다. 곡강 언덕에서 지는 꽃잎을 보면서 그는 봄날의 무상함에 잠겼다. 흩날리는 꽃잎 속에서 시인은 스러져가는 봄을 보았다. 그의 시상에 경탄한다. 내가 감히 부러워하는 재능이 바로 이것인데.


물살은 따뜻하고 자애롭다. 부드러운 물결로 넘실거리는 하천에는 화사한 봄이 가득하다. 긴 방죽 따라 늘어선 아파트 사잇길로 들어섰다. 하얀 목련이 탐스럽게 피었다가 떨어졌다. 하얀 목련이 필 때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던가. 그런 노랫말이 귓전에 맴돌았다.


바람이 부드럽게 얼굴을 스친다. 봄 햇살에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힐 사이 없이 바람이 어루만져준다. 허위허위 걷다 보니 저 멀리 역사가 보인다. 역사 주변에는 옛 마을의 집 몇 채가 남았다. 넓은 도로를 마다하고 좁은 골목길 사이를 이리저리 돌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 마을에 산 원주민인 양 흉내를 내보았다.

다시 나는 집으로 가는 열차를 탔다. 이 도시에 머물 수 없는 나는 이방인이다. 아니, 어느 곳인들 다를까. 하마 아득한 시절에 고향을 잃어버린 나는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다.


나는 쇼팽의 녹턴을 좋아한다. 누군가는 말했다. 멜로디가 너무 쓸쓸하지 않으냐고. 속으로 나는 되뇐다. 그래서 좋아하는 건데.


감성이 엇나갈 때 나는 홀로다. 그리고 고독 속으로 침잠한다. 그래서 에뜨랑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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