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한으로 가득한 일상이 답답하던 차, 학교의 미식(gastronomy) 과정을 담당하는 교수님의 샴페인 강의를 들을 일이 있었다.
샴페인은 겉으로는 화려한 축하의 술이지만, 본질은 제한의 술이다. 즉, 샴페인이라는 브랜딩을 받쳐주는 규제가 없었다면, 지금의 샴페인은 없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샴페인은 1년에 수확할 수 있는 포도의 양을 제한한다. 샹파뉴 지역에서 나는 포도로만 만들어야 샴페인으로 '부를 수' 있다. 샹파뉴 지역이 아니면 그건 샴페인이 아니라, 스파클링이다. 샴페인은 생산량도 와인에 비해서는 턱없이 작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만나는 버블이 있는 알콜은 스파클링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샹파뉴 지역의 포도는 허가받은 곳에서'만' 기를 수 있다. 심지어, 가정집에서 포도를 기르는 것도 안 된다. 만약 뒷뜰에서 샴페인 품종 포도를 기르다가 지나가던 사람이 보고 신고라도 하는 날엔, CIVC(샹파뉴 지방에서 샴페인 관련 일을 하는 협회)가 나타나서 포도나무를 기어이 파내고야 만다.
돈이 좀 있다고 하여 샹파뉴 지역에서 샴페인 도멘을 쉽게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6만 명가량 되는 재배자가 샹파뉴 지방의 90%의 면적을 차지하고 포도를 재배하거나 샴페인을 만든다고 한다. 몇 다리 건너면 서로 알 수 있다고 하며, 매우 닫힌 슬롯라고 할 수 있다. 1헥타르(ha)에 1.5백만 유로 가량 하는데, 1헥타르로는 어림도 없으니, 꽤나 부자여야 한다. 하지만, 돈 싸들고 간다고 한들, 샴페인 와이너리를 누군가 팔아주지도 않고, 설령 산다고 해도 관련 인증이 까다롭고 신고 절차도 복잡하다.
멀리서 보면 반짝이는 샴페인도, 가까이서 보면 제한투성이다.
즉, 규제와 규칙, 닫힌 슬롯 속에서 지켜낸 결과물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샴페인'이라 부르는 특별한 술이다.
삶도 그렇다. 화려하게 보이든 소박하게 보이든, 우리가 지켜내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면 그 뒤에는 반드시 제한이 따라온다. 샴페인처럼 사는 게 꼭 답이라는 건 아니다. 때로는 스파클링처럼 흉내만 내도 충분하다. 다만, 내가 끝까지 지켜내고 싶은 가치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어떤 제한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잊지 않고 살아가면 된다.
그런데 이 완벽한 비율의 제한은, 술이 만들어지는 과정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들은 어떤 사업가의 이야기가 오래 맴돈 적이 있다. 그가 스스로를 지켜낸 방식도, 결국 정확한 하나의 비율에서 시작되었다.
"사업을 4번 말아먹었다.
4번째로 사무실을 비우던 날, 텅 빈 공간 양팔 너비의 바카라상에 덩그러니 앉아 약을 털어넣고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죽을 거 소주나 한 병 먹고 가자. 사이다와 섞어서 빨리 마시고, 빨리 죽으러 가야겠다.
사이다를 1/7 정도 따르고, 나머지는 소주로 채웠다.
한 모금 마셨는데, 달았다.
이러려고 섞은 건 아니었다. 마실수록 오히려 정신이 또렷해졌다.
소주에게 고마웠다.
그동안, 인생의 쓴맛만 보았다. 내 인생과 참 닮았다는 생각에 소주가 좋았다.
하지만, 내가 사이다처럼 인생의 단맛을 아직 못 본 것은 아닐까?
단맛이 아주 조금만 섞여도 인생이 이렇게 다 술술 넘어가는데.
인생은 아직 다 마시지 못한 거대한 하나의 컵인데,
6/7 컵의 소주만 연달아 맛보고 인생은 쓰다고 생각한 건 아닐까.
아직 남은 삶에 사이다를 섞어보자."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처절한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거물이 되었다고 한다. 보통은 술자리에서 들은 이런 류의 이야기는 귀가와 동시에 잊는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오래 맴돌았다.
나는 생각했다.
과장이다. 조금 덜 쓰다고 단 것이 아니다.
거짓말이다. 쓰기만 한 인생에서 사이다를 어떻게 구한단 말인가.
한편으로는, 당연한 수순처럼 보이기도 했다.
똑같은 일상과 사고방식 속에서는 도저히 사이다를 떠올릴 수 없다. 절박하고, 동시에 이겨내려는 마음이 한구석에 있으며, 평소와 다른 시도, 가령, 사이다를 섞는다든지, 를 했기에 다른 각도로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창조적 사고에 관한 선구적 연구자인 윌러스는 창조적 문제 해결을 위해 그 문제로부터 몸과 마음이 일시적으로 떠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마치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부화의 시간처럼, 창조적 해결을 위한 침묵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김정운)
그렇다.
쩔쩔매면서 문제만 바라보면 여유를 잃는다. 장고 끝에 악수를 두게 된다. 그리고, 결과에 연연하면 과정이 주는 즐거움도 놓치고,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도 아니다.
죽으려고 마음을 먹는 순간, 죽을 용기가 있다면 살 용기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늘 먹고 보고 마시던 것이 다르게 보인다.
그러니, 버티면 기회는 온다. 다만 어쩔 수 없이 산다고 생각하기보단, 어떻게든 이겨나가겠다고 생각하면 된다. 나를 잃지 않으면, 시간의 문제일 뿐, 나의 시간은 온다.
문제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본디 작게 출발한 것이라도 그 문제가 점점 커진다.
다 놓고 싶을 때가 99%이지만, 자존감 지키면서 어떻게든 이겨나가겠다고 나머지 1%만 다짐해보자.
그래야 나를 지킬 수 있다.
현실은, 자주 다짐하더라도 더 처절하게 무너질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지키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
나를 지켜나간다면, 반드시 터널의 끝까지 걸어나갈 수 있다.
싫은 소리 좀 들었다고 위축되지 않아도 괜찮다. 남들은 나에게 그렇게까지 관심이 없다. 더 중요한 사실은, 죽을 힘을 다해서 내가 고비를 넘기고 자리를 잡으면 그걸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도드라지게 남아준다.
마치 체를 걸러 고운 모래만 남게 되듯이 말이다.
샹파뉴의 재배자들이 지켜낸 건 포도의 수확량이었고, 그 사업가가 지켜낸 건 자신의 조금 남은 자신감이었다. 크기는 다르지만 원리는 같다. 무엇을 얼마나 허락하고, 무엇을 얼마나 제한할 것인가. 그 정확한 비율을 정하고 지켜내는 일—그것이 반짝이는 것을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다. 샴페인이든, 인생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