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일이 전쟁 같을 때가 있다. 승전보를 울리는 날이 많으면 좋으련만, 패잔병 같은 기분일 때도 많다.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기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무너지지만 않으면 된다. 손자병법에서도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루는 것만큼 지키는 것도 힘든 일이다. 결코 쉽다고는 할 수 없다. 잘, 오래 버티기 위해서는 장군, 전략, 전술, 군인, 최신 무기 같은 것들도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진지를 구축하는 일이다.
진지를 구축한다는 것은 단순히 흙을 쌓고 벽을 세우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지탱할 토대를 만드는 행위다. 한두 명을 베어내는 얄팍한 승리를 좇아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선봉대는 기세등등해 보이나 금세 꺼지고 만다. 반면 차분히 땅을 다지고 방어선을 세운 군대는 거친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니 돌아갈 곳을 만들고 나를 안전하게 지키며 전투에 나갈 힘을 비축하는 일은, 처음부터 세워야 할 중요한 전략이다.
학술 논문을 쓰는 일도 다르지 않다. 화려한 아이디어를 칼처럼 휘두르면 단숨에 출판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 그런 승리는 드물다. 오히려 널리 알려지고 오래 버티는 논문은, 처음부터 이론적 토대를 촘촘히 다진 논문이다.
어떤 개념을 왜 써야 하는지, 그 개념이 기존 이론과 어떻게 다르고 더 발전시켰다고 주장하는 것인지, 리뷰어가 어느 지점에서 반박해올지를 미리 고려하여 참호처럼 파놓아야 한다. 서둘러 실험 돌리고 데이터 모으고 결과에 기대어 논지를 짜 맞추는 논문은, 초반에는 빠르게 치고 나가는 것 같아도 쉽게 무너질 수 있다.
반면 처음부터 왜 이 연구가 필요한지, 어떤 이론에 근거하고 있는지, 무엇을 새롭게 말하는지를 단단히 세운 논문은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좋은 논문도, 벼린 문장이나 화려한 결과가 아니라 싸울 전선(frontline)을 미리 확인하고 무너지지 않는 이론적 진지를 구축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삶도 이와 같다.
마음의 강력한 진지를 세운 사람은 작은 유혹이나 시비, 시련에 쉽게 휘둘리지 않는다.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자기만의 자리를 구축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깊은 의미의 전투 준비다.
유독 힘든 일이 연달아 나를 강타했던 시기가 있었다. 일어설 만하면 때리고, 겨우 짚고 일어나면 또 맞았다. 울어도 보고, 바카라도 읽어보고, 상담도 받아보고, 기도도 해봤다. 떠오르는 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봤다. 그러다 오랜만에 아빠와 동생들과 함께 떠난 가족 여행에서, 문득 이 생각이 떠올랐다.
관계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진지 구축의 출발점이다. 나를 믿고, 소중한 사람을 믿는 것. 그리고 힘들 때 기댈 수 있고, 내일의 해가 뜨면 다시 출전할 힘을 얻을 수 있는 관계. 그것이 진지 구축에 필요하다. 풍파가 모질어도 흔들림 없는 마음의 자리가 마련되면, 일어서서 다시 앞으로 밀고 갈 힘, 즉 동기를 뿜어낼 수 있다.
소중한 관계를 귀하게 여기고 그곳에서부터 출발해 진지를 구축하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승리는 벼린 칼끝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는 진지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