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 밑 아리에티
어릴 적 읽었던 <걸리버 여행기>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온몸이 밧줄에 묶인 채 손가락만 한 소인들에게 둘러싸인 걸리버의 삽화는 지금도 선명하다. 소총 탄환만 한 빵은 소인 가족이 힘겹게 옮겨야 할 식량이었지만, 걸리버에게는 한입거리도 되지 않았다. 그 작은 세상이 어딘가에 존재할 것만 같다는 상상은 영화 <마루 밑 아리에티>를 만나며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마루 밑 아리에티>는 인간 세상의 은밀한 틈새에서 자신들만의 우주를 일구는 작은 존재들의 이야기다. 지브리 특유의 섬세한 터치는 인간이 무심히 지나치는 사물들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그들은 인간의 물건을 훔치는 대신 ‘빌려 쓴다’고 말한다. 각설탕 한 개는 온 가족이 오래도록 나눌 주식이 되고, 두루마리 휴지 한 칸은 평생 덮을 이불이 된다. 성냥갑은 근사한 서랍장으로, 우표는 액자로, 빨래집게는 아리에티의 머리끈이 된다.
특히 돋보였던 것은 아리에티의 든든한 칼이 된 재봉용 시침핀이었다. 빨간 옷에 시침핀을 허리에 찬 아리에티는 작은 몸집이 믿기지 않을 만큼 당당했다. 마루 밑에는 아기자기한 그릇장과 식탁이 있고, 부지런히 차를 끓이는 엄마와 일터로 나서는 아빠가 있다. 작은 존재들이 만들어내는 삶의 밀도는 놀라울 정도로 선명하다.
아리에티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창가에 스미는 햇살 한 줄기와 찻잔에 담긴 홍차 한 방울마저 묵직한 생명력을 품고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하지만 소인들에게 인간의 세계는 동경의 대상이면서 경외와 공포의 대상이다. 가정부 아주머니의 집요한 감시와 생존을 위해 빌려야만 하는 물건들 사이에서 그들은 경계를 늦출 수 없다.
소녀 아리에티와 인간 소년 쇼의 만남은 그래서 더 아슬아슬하다. 심장병을 앓으며 삶의 끝을 예감하는 쇼에게 세상은 허무할 뿐이다. 그가 “너희는 곧 멸종할 거야”라고 말할 때, 거대한 운명 앞에 놓인 작은 존재의 무력함이 날카롭게 드러난다. 하지만 아리에티는 단호하게 답한다.
“우리는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않아.”
그 한마디에는 삶을 향한 강인한 의지와 세계에 대한 신뢰가 담겨 있다.
그녀의 태도는 쇼의 얼어붙은 마음을 조금씩 녹인다. 비록 공존할 수는 없어도, 손끝으로 건넨 각설탕 한 조각과 작별의 순간에 남긴 빨래집게는 크기를 뛰어넘는 유대가 된다. 아리에티는 쇼에게 살아갈 용기를, 쇼는 아리에티에게 세상을 향한 믿음을 건넨다.
영화는 성인이 된 쇼의 회상으로 시작된다. 그 시작만으로도 그 만남이 쇼에게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 짐작하게 한다.
쇼의 외증조 할아버지가 언젠가 마주칠 그들을 위해 영국에서 특별히 주문 제작했다는 ‘인형의 집’은 무척 매혹적이었다. 전등이 켜지고, 싱크대에서는 실제로 물이 흘렀다. 영국 빅토리아 양식의 가구와 도자기 식기는 실제를 축소한 듯 정교했다.
그 집에서 아리에티 가족이 편히 살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하지만 곧 그것이 관찰자의 동경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름답게 꾸며진 공간이라 해도 소인들에게는 호의로만 받아들여질 수 없다. 약자를 위한 배려가 때로는 지배와 관찰이라는 폭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존중은 그들의 삶을 내 방식으로 꾸며 주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생존 방식을 인정하는 데 있다.
영화의 끝에서 아리에티는 익숙한 세계를 떠난다. 그 뒷모습은 작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마루 밑’에서 살아간다. 세상이 너무 커 보여 숨고 싶은 날에도 아리에티는 끝내 마루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 작은 뒷모습이 지금도 문득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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