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1부. 디자인은 왜 죽고 있는가
학교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1919년, 독일 바이마르.
패전국 독일은 폐허였다. 제국은 무너졌고, 혁명이 거리를 휩쓸었고, 화폐는 가치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 혼돈의 한가운데서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는 작은 학교 하나를 열었다. 기존의 미술 아카데미와 공예학교를 통합한 학교였다. 학생 수는 많지 않았다. 건물도 특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학교가 내건 선언은 달랐다.
그로피우스가 쓴 창립 선언문은 한 장의 목판화와 함께 인쇄되었다. 리오넬 파이닝거가 새긴, 별빛이 쏟아지는 대성당. 선언문은 이렇게 외쳤다. "건축가, 조각가, 화가여, 우리 모두 공예로 돌아가자!" 그리고 핵심 문장. "예술가와 장인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예술과 공예를 통합하라. 순수예술과 응용예술의 경계를 없애라. 만드는 것과 생각하는 것을 하나로. 이것은 2장에서 본 윌리엄 모리스의 꿈과 정확히 같은 꿈이었다. 다만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었다. 모리스는 기계를 거부했지만, 바우하우스는 기계를 받아들였다. 손의 윤리를 기계의 시대 안에서 실현하겠다는 것. 그것이 바우하우스의 도박이었다.
바우하우스(Bauhaus). 집을 짓는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 학교는 말 그대로 현대 디자인의 집을 지었다.
바우하우스가 만든 것
바우하우스의 교육 방식은 당시 기준으로 급진적이었다.
모든 신입생은 전공에 들어가기 전에 예비과정(Vorkurs)을 거쳤다. 요하네스 이텐이 설계하고 훗날 모호이너지와 요제프 알베르스가 발전시킨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기존에 배운 모든 것을 일단 내려놓아야 했다. 그리고 재료에서 다시 시작했다. 종이를 자르고 접고 구기면서 종이의 성질을 발견한다. 나무, 금속, 직물, 유리. 학생들은 먼저 재료의 성질을 몸으로 이해했다. 그 다음 형태를 탐구했다. 기능을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미를 고민했다. 이 순서가 중요했다. 스타일에서 시작하지 않고 물질에서 시작하는 것.
예비과정을 마친 학생은 공방(Werkstatt)에 배속되었다. 그리고 모든 공방에서 두 명의 마이스터에게 배웠다. 한 명은 형태 마이스터, 즉 예술가. 한 명은 작업 마이스터, 즉 장인. 칸딘스키와 파울 클레 같은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형태를 가르치고, 숙련된 장인들이 기술을 가르쳤다. 개념과 기술을 동시에. 생각하는 능력과 만드는 능력을 분리하지 않는다는 철학이 교수 시스템 자체에 박혀 있었다.
바우하우스에서 나온 것들은 지금도 우리 주변에 있다. 마르셀 브로이어가 자전거 핸들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강철 튜브 의자 바실리 체어, 헤르베르트 바이어의 소문자 전용 타이포그래피, 마리안느 브란트의 금속 조명과 주전자, 빌헬름 바겐펠트의 램프. 100년이 지난 지금도 팔리고, 쓰이고, 모방된다. 당신이 지금 앉아 있는 의자에 강철 파이프가 쓰였다면, 그 계보는 데사우의 공방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바우하우스가 남긴 더 큰 유산은 물건이 아니었다. 사고방식이었다.
디자인은 장식이 아니다. 디자인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형태와 기능은 분리될 수 없다. 좋은 디자인은 대량생산을 통해 모두에게 도달해야 한다. 디자이너는 예술가이자 엔지니어이자 슬롯적 존재다. 이 명제들이 바우하우스에서 처음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오늘날 디자인 스쿨에서 가르치는 거의 모든 기초 교육 — 색채론, 조형 원리, 재료 연습 — 의 원형이 이 학교에서 만들어졌다.
14년의 수명
바우하우스는 1933년 문을 닫았다.
이 학교의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치와의 싸움이었다. 바이마르의 보수 세력에 밀려 1925년 데사우로 이전했고, 데사우에서 나치 세력이 시의회를 장악하자 1932년 베를린으로 옮겼고,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자 게슈타포가 학교를 폐쇄했다. 나치는 바우하우스를 '문화적 볼셰비즘'으로, 퇴폐 예술의 온상으로 규정했다. 평평한 지붕과 흰 벽조차 게르만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공격받았다.
학교는 죽었다. 그런데 바로 그 죽음이 바우하우스를 세계로 퍼뜨렸다.
교수들은 흩어졌다. 그로피우스는 하버드 건축대학원으로 갔다.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시카고의 IIT에서 건축을 가르치며 미국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바꿨다. 모호이너지는 시카고에 뉴바우하우스를 열었고, 이는 훗날 IIT 디자인 대학(Institute of Design)이 된다. 요제프 알베르스는 블랙마운틴 칼리지를 거쳐 예일로 가서 한 세대의 미국 예술가들을 길러냈다. 14년밖에 존재하지 않은 학교가, 폐교라는 형식의 디아스포라를 통해 세계 곳곳에 씨앗을 뿌렸다.
전후 미국에서 바우하우스의 철학은 새로운 토양을 만났다. 대량생산 시스템, 풍요로운 소비 시장, 기술의 급격한 발전. 그러나 토양이 바뀌면 식물도 변한다. 슬롯 개혁의 이상으로 출발한 바우하우스의 모더니즘은, 미국에서 점차 양식(style)으로 소비되기 시작했다. '인터내셔널 스타일'이라는 이름이 그 변화를 보여준다. 이상은 빠지고 외형이 남은 것이다. 4장에서 본 욕망의 시장은 바우하우스의 미학마저 하나의 상품 스타일로 흡수했다.
그러나 핵심은 살아남았다. 디자인은 생각하는 행위라는 것. 물건의 형태를 결정하기 전에, 그 물건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는 것.
울름 조형대학과 체계의 시대
바우하우스의 적자(嫡子)를 꼽으라면 울름 조형대학(HfG Ulm)이다.
1953년 서독 울름에서 설립된 이 학교의 출발점은 무거웠다. 공동 설립자 잉게 숄은 나치에 저항하다 처형된 백장미단 한스 숄과 조피 숄의 누이였다. 학교는 처형된 남매를 기리는 재단 위에 세워졌다. 디자인 교육이 곧 민주주의 재건의 일부라는 믿음. 초대 학장은 바우하우스 출신의 막스 빌이었다.
울름은 바우하우스의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방향을 틀었다. 예술보다 과학. 직관보다 방법론. 커리큘럼에는 기호학, 인간공학, 수학, 슬롯학이 들어왔다. 디자인 결정은 취향이 아니라 분석으로 정당화되어야 했다. 디자인을 체계적인 학문으로 만들려는 시도. 오늘날 '디자인 방법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의 출발점이 여기였다.
울름은 브라운(Braun)과의 협업으로 유명하다. 한스 구겔로트와 디터 람스(Dieter Rams)가 이끈 브라운의 제품들은 울름의 철학을 현실로 만들었다. 1956년의 오디오 SK4는 투명 아크릴 덮개 때문에 '백설공주의 관'이라고 불렸다. 군더더기 없는 형태, 명확한 기능, 절제된 색상. 람스는 훗날 자신의 디자인 철학을 열 가지 원칙으로 정리했는데,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좋은 디자인은 혁신적이다. 좋은 디자인은 제품을 유용하게 만든다. 좋은 디자인은 아름답다. 좋은 디자인은 제품을 이해하기 쉽게 만든다. 좋은 디자인은 불필요하게 눈에 띄지 않는다. 좋은 디자인은 정직하다. 좋은 디자인은 오래간다. 좋은 디자인은 마지막 디테일까지 철저하다. 좋은 디자인은 환경을 생각한다. 좋은 디자인은 가능한 한 최소한의 디자인이다." (디터 람스, '좋은 디자인의 10원칙')
열 번째 원칙의 원문은 'Weniger, aber besser' — 더 적게, 그러나 더 좋게다.
일곱 번째 원칙을 다시 보라. 좋은 디자인은 오래간다. 이것은 4장에서 본 계획된 노후화에 대한 정면 반박이다. 같은 시대에 대서양의 양쪽에서, 디자인은 정반대의 윤리를 발전시키고 있었다. 디트로이트는 매년 낡게 만들었고, 울름은 영원히 남게 만들려 했다.
수십 년 후 조너선 아이브(Jonathan Ive)는 애플 제품을 디자인하면서 람스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반복적으로 인정했다. 초기 아이팟의 계산된 단순함과 브라운 계산기 ET66을 나란히 놓으면 그 계보는 설명이 필요 없다. 바우하우스에서 울름으로, 울름에서 브라운으로, 브라운에서 애플로. 현대 디자인의 유전자는 이렇게 이어졌다. 당신의 주머니 속 스마트폰의 조상은 데사우의 공방이다.
바우하우스가 해결하지 못한 것
바우하우스는 디자인에게 철학을 주었다. 그러나 한 가지를 해결하지 못했다.
누구를 위한 디자인인가.
바우하우스의 이상은 모든 사람을 위한 좋은 디자인이었다. 대량생산을 통해 질 좋은 물건을 모두에게. 그러나 현실에서 바우하우스의 미학은 특정 계층의 취향이 되었다. 미니멀하고, 기능적이고, 절제된 것. 흰 벽과 검은 가죽과 강철 파이프. 이것은 보편적 미학이 아니라 교육받은 중산층 이상의 미학이었다. 바실리 체어는 노동자의 거실이 아니라 건축가의 사무실에 놓였다. 오늘날에도 '미니멀 인테리어'는 사실상 계급의 기호다. 비어 있는 공간은 채울 필요가 없는 여유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울름은 이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드러냈다. 과학적 방법론은 디자인에 엄밀함을 주었지만, 동시에 디자인을 전문가의 언어로 봉인했다. 분석할 수 있는 자만이 디자인을 말할 수 있다면, 일상의 사용자는 디자인의 대화에서 배제된다. 모두를 위한 디자인을 추구한 학문이 소수만 이해하는 언어로 말하게 된 것이다.
디자인이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선언과 실제로 디자인이 접근 가능한 것인가 하는 현실 사이의 간극. 이 문제는 바우하우스 이후에도 계속 디자인을 따라다녔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답해지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한편, 이 시대까지의 디자인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모리스든 로위든 람스든, 그들은 모두 물건을 다뤘다. 손에 쥘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그러나 다음 시대의 디자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다루기 시작한다. 감정, 경험, 그리고 화면 너머의 세계. 디자인의 두 번째 대확장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