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직함 칸을 채우는 데 아흐레가 걸렸다

by산에태양

첫 일이 끝난 뒤, 나는 명함부터 다시 만들었다

첫 일이 끝났다. 계약서에 적힌 날짜가 지나자 메일함은 조용해졌고, 아침에 갈 곳도 사라졌다.

퇴직하고 처음 받은 일이었다. 그 일이 끝나면 다음 일이 이어질 줄 알았다. 이어지지 않았다. 그 주에 연락처에 저장된 769개의 이름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스크롤만 했다.

처음 이틀은 쉰다고 생각했다. 사흘째부터는 쉬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일이 없다는 것보다 불편한 게 따로 있었다. 누가 "요즘 뭐 하세요?"라고 물으면 한 문장으로 답할 수가 없었다. 이력은 길다. 대기업과 플랫폼 회사를 거쳐 대표이사까지 27년이다. 그런데 지금의 나를 설명하는 문장은 없었다. 이력서에는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가 적혀 있다. 지금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러다 명함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을 하나 했으니 명함이 필요하다는 단순한 이유였다. 그런데 직함 칸 앞에서 손이 멈췄다.

대표이사라고 쓸 수는 없었다. 컨설턴트라고 쓰면 거짓은 아닌데 나 같지 않았다. 대표라고 쓰면 맞는 것 같으면서도 민망했다. 한 줄을 쓰고 지우고, 또 쓰고 지웠다. 이름 석 자와 연락처는 금방 채웠는데, 그 위의 한 줄이 아흐레 동안 비어 있었다.

돌아보면 그 아흐레는 명함을 만든 시간이 아니었다. 나를 소개할 문장이 없다는 사실과 마주 앉아 있던 시간이었다. 회사에 있을 때는 그 문장을 회사가 대신 써줬다. 소속이 말해줬고, 직바카라이 말해줬다. 나는 한 번도 직접 쓴 적이 없었다.

그래서 방법을 바꿨다. 이름을 어떻게 부를지를 먼저 정하지 않고, 지난 일들을 종이에 적었다. 무슨 직바카라이었는지가 아니라 무슨 일을 했는지를 적었다. 적어 내려갈수록 직함은 흩어지고, 반복되는 것 하나만 남았다.

그렇게 남은 문장이 이것이다.

실행 중심으로, 모두가 포기한 업무를 진행했다.

읽는 순간 알았다. 이게 나였다. 직바카라이 무엇이든, 어느 회사든, 내가 맡았던 일은 결국 이런 일이었다. 이력서 어디에도 없던 문장인데, 이력 전체를 가장 짧게 설명하는 문장이었다. 화려하지 않아서 오히려 믿을 수 있었다.

그 문장을 중심에 놓고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첫 화면에 무엇을 둘지, 무엇을 뺄지 정하는 일은 의외로 이력서 쓰기보다 어려웠다. 화려한 경력을 앞에 두면 쉽게 채워졌다. 하지만 그건 내가 가진 것이었지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아니었다. 쓰는 동안 몇 번이나 "이건 과거의 나를 자랑하는 문장이다"라고 지웠다. 마지막에 남은 문장은 처음 생각한 것보다 훨씬 짧았다.

명함이 도착한 날, 상자를 열어 한 장을 꺼냈다. 가벼웠다. 종이 한 장이 이렇게 가벼운데, 그 한 줄을 정하느라 아흐레가 걸렸다는 게 이상했다. 가볍지 않았던 건 종이가 아니라 그 위에 적힌 문장이었다.

이 온라인카지노북은 그 뒤의 기록이다. 명함과 홈페이지를 만든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일을 구하는 방법도, 값을 매기는 방법도, 혼자 해보니 막히는 일들도 하나씩 다시 만들어야 했다. 잘된 것만큼 막힌 것도 적으려 한다. 아직 진행 중인 이야기라서, 어디로 가는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이 이야기의 시작은 분명하다. 첫 일이 끝난 날 메일함이 조용했고, 직함 칸이 비어 있었다. 거기서부터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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