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나름 유명하다는 성당으로 향했다. 처음 유럽의 성당에 들어섰을 때 느꼈던 전율은 아직도 생생한데, 고작 며칠 사이에 몇 군데를 더 보고 나니 성당 내부는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억에 남은 건 성당 앞에 조성된 튤립 정원이었다. 비를 머금은 연분홍색 튤립들이 고개를 숙인 채 줄지어 서 있었고, 꽃잎 위에는 작은 물방울들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엄마는 한참 동안 그 앞을 떠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다가 문득 생각났다. 맞아. 우리 엄마는 원래 꽃을 참 좋아하던 사람이었지. 하지만 꽃은 오래 피어 있지 않았고, 아빠는 꽃을 사는 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어느새 엄마도 꽃을 받으면 좋아하면서도 "돈이 아깝다"는 말을 먼저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 꽃이 일상이 된 이 나라가 얼마나 더 좋았을까. 이 여행은 풍경을 보여주는 여행이기도 했지만, 엄마가 좋아하는 것들을 다시 하나씩 찾아가는 여행이기도 했다. 우리는 우산을 쓰고 이리저리 몸을 틀어가며 사진을 찍었다.
"너는 왜 배경을 이렇게 흐릿하게 찍니?"
"원래 좋은 카메라는 그런 거야.”
그때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이제 와서 고백하자면, 나는 DSLR 사용법을 잘 몰랐다. 엄마 말이 맞았다. 사진은 죄다 배경이 날아가 있었다.
미안해, 엄마. 이젠 잘 알아. 다음에 여행 가면 배경도 쨍하게 같이 찍어줄게.
이전까지는 정신없이 일정을 소화하느라 시간이 부족했는데, 인스브루크에서는 오히려 시간이 남았다. 도보로 갈 수 있는 곳은 거의 다 둘러봤고, 시간이 애매해서 멀리 있는 곳은 딱 한 군데 정도만 더 갈 수 있었다. 나는 인스브루크 카드를 사며 받은 관광바카라자를 엄마에게 슬쩍 건넸다.
"엄마, 어디 가보고 싶어요? 하나 골라봐요."
당연히 "네가 가자는 데 갈게."라는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다.
그런데 엄마는 바카라자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곳을 가리켰다.
"여기 가보자."
엄마가 고른 곳은 스와로브스키 박물관이었다. 사실 나는 일부러 후보에서 빼놓고 있었다. 인스브루크 카드로 무료 입장이 가능했지만, 왠지 상업적인 공간일 것 같았다. 절대 상술에 넘어가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며 박물관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 다짐은 입장과 동시에 무너졌다.
우리는 또 시골쥐가 되었다. 수만 개의 크리스털이 사방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벽도 반짝이고, 천장도 반짝이고, 전시품도 반짝였다. 우리는 하나라도 놓칠세라 이리저리 둘러보며 사진을 찍었다. 장신구라고 하기에는 너무 화려했고, 예술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아름다웠다. 천 대신 보석으로만 만든 속옷까지 전시되어 있었다.
"아니, 저런 건 어떻게 입는대?"
"그러게. 아프겠는데."
"저런 건 얼마일까?"
"내가 사줄까, 엄마?”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또 한참을 웃었다. 상술에 안 넘어가겠다고 다짐했지만, 예쁜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정도면 하나쯤은 괜찮지 않을까?' 엄마에게 작은 기념품 하나쯤 선물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는 끝내 아무것도 고르지 않았다. 정말 마음에 드는 게 없었던 건지, 아니면 딸 주머니 사정을 생각한 건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박물관 밖도 잘 꾸며져 있었다. 스핑크스 입에서 물이 쏟아지는 분수도 있었고, 각도만 맞추면 마치 물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분수도 있었다. 우리는 거기서 한 시간이 넘도록 사진을 찍으며 놀았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웃는 것 같아 괜히 민망했다. 그런데 조금 뒤 그 사람들도 똑같은 자세를 하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리는 또 그게 웃겨서 한참을 웃었다.
우리 가족에게는 폭포나 분수가 있으면 꼭 하는 사진이 하나 있다. 입을 벌리고 물을 받아먹는 척 찍는 사진. 당연히 이번에도 도전했다. 엄마 사진은 당연히 한 번에 성공했다.
이제 내 차례였다. 참고로 말하자면 우리 엄마는 사진을 정말 못 찍는다. 감성은 둘째치고, 있는 그대로 아주 정직하게 찍는다. 사진은 사람을 조금이라도 예쁘게 찍어줘야 하는데, 엄마 사진은 외모가 마이너스가 되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였다.
나는 분수를 향해 입을 벌리고 섰다. 그런데 결과물은... 이마에 물을 맞고 있거나, 허공에 입을 벌리고 있거나, 분수와는 한참 떨어져 있는 사진뿐이었다.
"아니, 물을 먹게 해달라고요.”
나는 이번에는 꼭 성공하겠다는 마음으로 몇 번이고 다시 섰다. 엄마는 웃느라 거의 눈물까지 흘리며 말했다.
"한 번만 더 해봐.이번엔 진짜 잘 찍어줄게."
엄마를 믿고 또 몇 번을 더 찍었다. 결과는 역시 똑같았다. 우리는 결국 제대로 된 사진을 얻지 못했다. 성공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꺾어댄 내 목만 좀 아팠다. 엄마가 사진을 못 찍는 덕분에, 우리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사진을 보며 똑같이 웃는다.
엄마는 지금도 본인이 사진을 꽤 잘 찍는다고 생각한다. 사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실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굳이 말해주지는 않았다. 살면서 꼭 밝혀야 하는 진실만 있는 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