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텃밭 14
텃밭으로 가는 길, 논의 벼이삭이 알알이 몸을 채우고 있었다. 길가에는 노란 들꽃과 강아지풀이 바람에 흔들렸다. 한낮의 공기는 여전히 더웠지만, 들판은 이미 가을 쪽으로 한 걸음 더 건너가고 있었다.
텃밭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토란잎이 눈에 들어왔다. 한여름 내내 크고 푸른 잎을 펼쳐 그늘을 만들던 토란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잎 가장자리가 갈색으로 마르고, 아래쪽 잎들은 누렇게 사그라들고 있었다.
토란잎이 계절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토란을 캘 때가 다가오고 있다. 다음 달이면 추석이니, 잘 여문 토란을 캐서 들깨가루를 넉넉히 넣은 토란탕을 끓일 수도 있겠다.
달력을 보지 않아도 밭에 오면 절기를 알 수 있다.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것으로, 푸르던 잎이 누렇게 몸을 접는 것으로 계절은 제때를 알려준다.
내 텃밭 옆의 고구마밭은 유난히 무성했다. 그 밭 주인 아주머니가 몸이 편찮아 한동안 나오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평소 서로의 밭에서 난 것을 나누어 먹던 사이였다. 내가 기른 채소를 건네기도 하고, 아주머니가 거둔 것을 얻어 오기도 했다.
주인의 발길이 뜸했던 밭에는 풀과 고구마순이 한데 뒤엉켜 자라고 있었다. 풀도 벨 겸 고구마순을 정리했다. 연하고 먹기 좋은 줄기를 똑똑 꺾어 장바구니에 담다 보니 제법 한 줌이 되었다. 들껫잎도 한바구니 따 담았다.
일을 마칠 무렵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두 방울 떨어지더니 이내 주룩주룩 쏟아졌다. 그동안 이곳에는 비다운 비가 좀처럼 내리지 않았다. 땅은 바짝 말랐고, 심어놓은 작물들은 하루하루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그러니 이 비가 얼마나 반가운지. 단비 중의 단비요, 꿀비였다. 빗물을 받아먹은 작물들이 말라가던 몸을 일으켜 다시 숨을 쉬는 것 같았다. 나도 비를 피해 서서 한동안 젖어가는 밭을 바라보았다.
들깻잎도 한 바구니 가득 따왔다. 깻잎김치를 담그고 나면 한동안 밥상이 든든할 것이다. 옥수수도 이제 제법 알이 차오르고 있다. 며칠 더 기다렸다가 여문 것부터 하나씩 따야겠다.
주변의 다른 밭들은 벌써 여름 농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차례 숨을 고른 땅에 김장 배추와 무를 심을 모양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나도 별 고민 없이 씨앗을 뿌리거나 모종을 심었을 것이다. 그런데 올해는 빈 밭을 바라보며 자꾸 망설이게 된다.
오는 11월 초에는 이사를 해야 한다. 다른 도시로 이사 간 곳에서 이 텃밭까지 오가려면 거리가 너무 멀다. 배추와 무를 심는다는 것은 앞으로 두어 달 동안 물을 주고, 벌레를 잡고,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겠다는 약속이다. 과연 그 약속을 끝까지 지킬 수 있을까.
마음은 아직 무언가를 심고 싶어 하는데, 형편은 이제 잘 거두고 정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지금 밭에 남은 것만 잘 거두어도 할 일이 적지 않다. 추석 무렵에는 토란을 캐야 하고, 알이 차오르는 옥수수도 따야 한다. 들깨와 고추도 마지막까지 살펴야 한다. 그렇게 하나씩 거두다 보면 밭도, 내 마음도 천천히 정리될지 모르겠다.
비를 머금은 밭은 한층 짙은 초록빛이었다. 누렇게 사그라드는 토란잎 옆에서는 아직 새잎이 돋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끝나고, 다른 한쪽에서는 다시 시작되는 것이 밭의 시간이다.
배추와 무를 심을 자리를 바라보며 한동안 서 있었다.
계절은 다시 심으라 하고, 나는 이제 잘 거두는 법을 생각한다.
집으로 와 고구마 순 껍질을 벗기고 들깨가루를 넣어 볶았다. 남의 밭과 내 밭을 굳이 나누지 않고 오가며 거둔 고마운 한 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