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위로, 기본요금 1,500원

하지만 옳은 선택이란 없었다. 가보지 않은 길이 있을 뿐이었다.

by느슨

그날도 중간고사 때문에 밤을 새워 공부하다 새벽에 깜박 잠이 들었다. 찰나를 지나 눈을 떴을 때 기숙사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나를 깨워주지 않았다. 시험 시작 시간은 이미 지나 있었다.

울면서 강의실로 뛰어가는 길에 쓰러졌다.


발작을 한 것이다.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잔디밭에 누워 있었다.

온몸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구름이었다.

푸른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 그 너머로 치악산이 보였다. 한 번도 올라가 볼 생각을 해본 적 없는 산이었다.


다들 시험을 보고 있는 시간이었다. 캠퍼스가 유독 고요했다.

온몸을 떨며 발작하는 나를 아무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것만으로 다행이었다.

시험시간에 늦었더라도...


힘이 빠져 바로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한동안 그냥 누워 있었다.

누군가 내 옆을 지나다 흠칫 놀라거나 119를 부를까 봐 조금 긴장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그것이 어쩌면 내 대학생활을 가장 잘 요약하는 장면이었는지도 모른다.


몸이 안 좋으면 수업 사이사이 병원 휴게실이나 화장실에 들어가 앉아 있다가 나왔다. 심하게 뛰거나, 음식을 많이 먹거나, 잠을 못자면 안됐다. 셋 중 하나라도 어기면 몸은 어김없이 반응했다.

그래서 신경의 절반은 늘 몸 쪽에 쏟아두고 나머지 절반으로 공부를 했다.

가급적 발작을 조절하면서 생활하려 했지만,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시험장에 도착하니 삼십 분이 지나 있었다. 발작 직후라서 손에 힘이 없어 볼펜을 제대로 쥘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답안지를 꾸역꾸역 채워 나갔다.


그런데 나를 결국 무너뜨린 것은 방금 죽을 것 같았던 발작도, 나를 깨우지 않고 시험장으로 간 친구들의 따돌림도 아니었다.

밤을 새워 공부했는데도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쥐어짜듯 써 내려간 답들은 방금 전 잔디밭에 쓰러져 있던 나처럼 삐뚤고 힘이 없었다.

시험지를 내려다보는 순간, 현실이 선명해졌다.


세상을 원망한 것도, 병을 원망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나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났다. 어쩌면 장애를 이겨내고 성공하는 사람의 표본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 믿음이 틀렸다는 것을, 그날 처음으로 인정해야 했다.


써 내려갔던 답안지를 모두 지우고 백지를 냈다.

그때는 그것이 자존심이었다.

붉은 얼굴로 강의실을 뛰쳐나왔다.

가장 늦게 들어와 가장 빨리 나가는 나를 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짐도 챙기지 않고 바로 서울행 버스를 탔다.


터미널까지 가는 택시 안에서 기사 아저씨에게 물었다.


"저 24살인데요…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요?"


지금 생각하면 꽤 민망하지만,

그런 질문을 할 줄 나도 몰랐다.


"아우… 아기네. 뭐든 시작할 수 있는 나이구먼."


머리가 희끗희끗한 아저씨는 백미러로 자꾸 힐끔거렸다. 훌쩍이며 엉뚱한 질문을 던지는 학생이 걱정되었던 모양이었다.

호기롭게 시험장을 뛰쳐나왔지만 속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불안에 죽을 것만 같았다.

낯선 도시에서, 그 누구의 위로도 받지 못했던 나는 그 한마디에 본격적으로 울음을 쏟아냈다.


짧은 위로였다. 그 5분이 나를 붙들었다.

도망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그렇게 너무 쉽게 알았다.

5분짜리 택시 안에서,

기본요금은 1,800원이었다.




수능을 다시 보고 대학에 입학했다. 스물다섯이었다.

나는 해부학 교재 대신 카메라를 들었다. 렌즈 너머로 세상을 바라보며 4년을 보냈다. 경제적 여유가 없어 극장 대신 도서관 자료실에 앉아 CD로 영화를 봤다. 무슨 내용인지 잘 이해를 못해도 하루 한 편.

그것만으로 충만한 날들이었다.


인천에서 신촌까지 매일 타고 다녔던 고속버스에서 나이에 맞는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일상의 대화를 나누는 법도 배웠다. 파마를 했다가 쇼트커트를 했다가 염색을 했다. 연극을 보고, 미팅을 하고, 친구의 자취방에 모여 연말 파자마 파티를 했다.

그렇게 사람에게 상처받았던 내가, 다시 사람으로부터 따뜻해졌다.


화양연화(花樣年華)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게 나 같은 사람에게 쓰는 말인지 몰랐다.

꽃 같은 시절. 화면 속 장국영이나 어울릴 것 같은 단어였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그때였다.


공강 시간에는 농구하는 것을 구경하며 벤치에 앉아 아무것도 안 했다. 공의 움직임을 멍하니 좇으며 시간을 보내고, 편의점 김밥을 먹으면서 내일을 걱정하지 않았다.

틀려도 괜찮다고, 다시 해보자고 누군가 말해주는 시간이었다.


스물다섯, 불안하지 않았다.

오늘만 살 듯 살았고, 몸에 대한 불안도 그리 크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는데, 그때는 그것조차 몰랐다.

다시 시작할 수 있냐고 물었던 내가, 그렇게 다시 시작했다.


시간이란 얄밉도록 제 갈 길만 간다. 기다려달라고 해도 안 기다리고, 잊고 싶다고 해도 제멋대로 붙들어두다가, 정작 붙들어두고 싶은 것은 슬그머니 놓아버린다.

힘들었던 시절도

인생 최고의 그 시절도 그렇게 흐려졌다.

잊는다는 것이 회복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대학 졸업을 앞두고 독립했다. 독립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이혼한 오빠와 조카들과 함께 살면서, 자연스럽게 부모님과 거리가 생겼고, 그게 편안했다.


꽤 오랫동안,

부모님께 무언가를 증명하는 삶을 살았다.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하지만 옳은 선택이란 없었다. 가보지 않은 길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아직도 앞으로 걸으면서 걷지 못한 길을 가끔 돌아본다.

혹은 뒤를 보느라 헛발질을 하고 넘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기에,

후회가 아닌 이상, 그냥 내버려 둔다.


다만 오늘도,

내가 한 선택이 옳은 선택이 아니라 최선의 선택이 되도록 만들어가려는 마음과

이제 증명은 아침마다 거울 속 나와 눈을 마주치고 다짐하는 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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