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 유희 사이에서
엄마는 일 안 하는데, 나는 왜 맨날 일해?
등굣길에 아이가 불쑥 물었다.
'학교에 가는 것이 일이라고?
어휴... 엄마야말로 복직하면 진짜 일하러 가는 거지. '
속으로는 정말 어처구니없었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매일 학교와 학원에 가는 것이 '일'로 느껴졌나 보다.
"엄마도 곧 다시 일 시작할 거야. 지금은 네가 학교 입학했으니까 엄마가 도와주려고 쉬는 거지. 그래도 학교 가면 맛있는 급식도 먹고 친구들이랑 놀 수 있으니까 좋잖아? "
아이들이 늘 그렇듯, 자기가 궁금해서 질문해 놓고도 대답을 들으면 금세 또 잊는다.
휴직을 하면 생각보다 시간이 많을 것 같았는데, 독박 엄마는 할 일이 참 많다. 여기저기 아이 픽업부터 숙제 봐주기, 식사나 목욕 등의 양육, 매일 쏟아지는 집안일까지... 밖에 나가서 하는 일은 그래도 보람이 느껴지곤 했는데, 집에서 하는 자잘한 일들은 가끔 의미 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제는 밀린 집안일을 하느라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글쓰기는 엄두도 못 내고 무언가에 대해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고단했던 하루를 마무리하고 일기를 쓰는데, 문득 '노동'이 있기에 그래도 일상을 버티는 게 아닌가 싶었다. 매일 루틴, 일, 노동이 없었다면 머릿속은 잡생각이, 가슴엔 우울함이 가득했을지도 모른다.
선생님! 노동요 틀어도 되나요?
몇 년 전, 중학교 2학년 담임을 할 때였다. 우리 반 반장은 낙천적인 면이 돋보이는 친구였다. 그런 친화성으로 전교 회장까지 됐다.
그 아이는 청소 시간만 되면 '노동요'를 들어야 청소할 맛이 난다며 교실 TV스피커와 핸드폰 연결해 크게 틀어도 되냐고 묻곤 했다. 집에서도 늘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집안일을 하는 나는 흔쾌히 허락했다.
어릴 적 이탈리아에서 몇 년 살다 왔다는데, 그래서였을까. 힘든 일이 있어도 특유의 긍정과 밝음, 여유가 있어서 참 요즘 보기 드문 아이라는 생각을 종종 했다.
음악으로 노동을 '유희'로 만들어버리는 기술!
어른이 될수록, 나이가 들수록
<노동>은 늘어나고 <유희>는 사라진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문득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오른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놀다가 문득 어스름이 깔리고, 아이들도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면 너무 늦었나 싶어 괜히 무섭고 조급해졌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베란다 창문 너머로, 들어와서 밥 먹으라며 소리치시던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고, 안도감과 함께 집으로 뛰어 들어가곤 했었다.
아이들은 참 신기해요.
그냥 저렇게 가만히 두는데,
자기들끼리 놀이를 만들어서
뭐가 저리 재밌는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노네요.
놀이터에서 친구 엄마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놀이에 집중하는 아이들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유희하는 인간
유희하는 인간은 아름답다. 오로지 행위 자체가 목적인, 놀이에 빠져들어 몰두하는 모습이 참 예쁘고 생기 있다. 진정으로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아이였을 때는 누구나 저렇게 놀이를 하는데, 어느 순간 '지금의 유희'를 희생할 때가 많아진다.
아이들은 아름답다. 놀다가 옷에 흙이 묻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 오늘,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영원히 놀지 못할 것처럼 논다. 그런 모습은 언제나 날 황홀하게 만든다.
겨울에 폭설이 내릴 때면 나는 종종 아이들과 운동장으로 뛰어 나간다. 담임 시간이든 수업 시간이든 한 시간을 빼서 눈놀이를 한다. 대신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미리 학부모님 동의도 받고, 수건과 여벌옷, 방한용품을 챙겨 오게 한다.
춥든 말든 신나게 구르다가 들어온 아이들의 젖은 머리카락을 말려줄 때면 뿌듯함이 밀려온다.
하얀 눈밭에서 야생 동물처럼 뛰어다니는 아이들! 나는 이 풍경에 늘 매료된다.
특별한 균열을 내주는 것
한 아이의 엄마로서, 아이와 어른의 경계에 서 있는 중학생들의 교사로서, 그리고 어느덧 중년으로 향해가는 한 사람으로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어쩌면 거창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반복되는 일상과 노동 속에, 잠시 숨을 틔울 수 있는 특별한 균열을 내주는 것. 그것이 지금 내 자리에서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역할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