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근처에 100년이 넘은 대형 교회가 있다. 목요일에는 온라인 게임인 예배가 있고, 친교실에서 식사를 사 먹을 수 있다. 종종 거기서 식사를 하곤 했다. 저렴하고(5,000원) 건강한 식사를 먹을 수 있어서, 몇 번 갔다. 아마도 오늘이 네 번째 정도인 것 같다. 큰 교회여서 주변의 온라인 게임인들과 사람들을 위해서 이런 슬롯공헌을 하는구나 하고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감사한 마음으로 먹었는데, 오늘 내가 외부인인지를 묻더니, 내일부터 오지 말라고 했다. 문 앞에 써둔 것을 못 보았냐고. 나는 답변할 말을 찾지 못하고, 무안하게 자리로 와서 식사를 마치고 나와 안내문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이곳은 식당이 아니라 준비한 수량이 부족하니 외부인은 식사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식사양을 예측하고 준비해야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식당 오듯 친교실을 이용하는 외부인이 못마땅할 수도 있다. 누가 새로 오기만 하면 두 팔 두 발로 환영하는 작은 교회와는 다른 분위기다.
내가 의아했던 것은 여기서 말하는 친교가, 오로지 교인들, 내부인들 간의 쾌적한? 친교를 위한 공간을 의미하는 것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것. 내가 배우기로는 교회란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고, 배고픈 이에게 식사를 제공할 수도 있는 곳이다. 교회가 개교회의 교인들만을 위한 서비스시설인 것이라 생각하니, 이 거대한 빌딩이 굉장히 폐쇄적이고 불편하게 다가왔다. 마음이 몹시도 씁쓸했다. 안내문구를 보면 마치 외부인인 내가 식당처럼 자신들의 공간을 침범하고 운영에 불편함을 끼친 나쁜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감사하며 대접받는다는 마음으로 먹은 4번의 식사를 대한 내 마음이 아까웠다. 교인들이 배식봉사하는 것이 그래서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오로지 교인들을 위해서만 봉사하는 것이었구나 깨달았다.
나는 스무 살 때부터 이모가 섬기는 교회를 다녔다. 처음엔 이모와 대학생이 된 나, 그리고 동네 초등학생이 전부였던 교회. 지금도 여전히 작지만, 미자립 교회이던 우리 교회는 자립을 하고, 그럭저럭 교회 월세를 내며 빚을 지지 않고, 위로가 필요한 교인들에게 서로의 곁이 되어주며, 예배를 멈추지 않는 교회로 스무 해 넘게 유지되고 있다. 작은 교회를 섬기는 교인으로서 이런 대형 교회란 늘 더 베풀고 넉넉할 것을 기대하게 된다. 같은 교단의 교회에서, 교단을 넘어서 한국교회사적으로도 상징성이 있는 교회에서, 이렇게 내부인과 외부인을 구분하며, 식사 한 끼의 환대가 아닌 박대를 눈앞에서 당하고 보니 속이 쓰렸다. 예수 믿는 다른 동료더러 같이 가보자고 하며 방문한 터였고, 그 친구에게는 이 교회 첫 방문이기도 했다. 그나마 나와 그 친구가 교인이라 얼마나 다행인가. 믿지 않는 이였다면 앞으로 교회를 어떤 곳이라고 생각할까 싶기도 했다.
코로나 이전이었던 것 같다. 우리 교회는 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리러 성도들과 다 함께 이 교회를 찾아와 부활절 예배를 드렸다. 거대한 성전을 보며 또 거룩함이 형식에서 나오기도 하구나 하며 부러운 마음이었다. 점심을 먹으러 오며 목요 온라인 게임인 예배도 드리러 가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믿지 않는 동료에게도 같이 가자 권하고 싶었고. 식사는 당연히 그런 매개라 여겼다. 그 미자립 교회에서도 동네 어르신들에게 수요일마다 무료식사를 대접하기를 십수 년 했으니, 내게 이 교회의 친교실이 좋은 재료로 좋은 가격에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개된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일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요즘 육아로 제대로 예배에 집중도 못하는 나라서, 이 교회의 목요 온라인 게임인 예배가 힐링이 될 거란 기대가 있었는데, 가도 될지 망설여진다. 개교인들만을 위하는 교회라는 철학을 가진 교인들이 그곳에 가득하다면, 그런 철학을 지닌 목회자분들이라면. 물론 가보지 않고 속단할 수는 없지만. 지역슬롯의 구성원들과 무관한 교회는 상상이 잘 안 된다. 목요일에 예배를 드리면, 그날 하루는 외부인이 아닌 걸까? 식사를 해도 되는 걸까? 왜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걸까 의문이 든다. 환대하는 공간이 아닌, 교인 외의 모든 이가 외부인이 되고, 교회에 침범한 사람으로 취급된다면, 교회다운 것인가. 영리를 추구하는 법인들도 슬롯공헌을 하는데, 초라한 밥 한 끼에, 내 눈을 보며 박대하는 그 교인의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나는 ‘외부인이세요?‘라는 질문에, 순간적으로도 이해를 못 해서 외부인이 누구인데요?라고 묻기까지 했으니. 뭐, 나는 이제 더 이상 가지 않으면 그만이기는 하다. 너무 충격적이어서, 일기를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 교인들 마음이긴 하다. 교인들이 마음 모아 세운 교회에 내가 무슨 자격이 있겠나. 지극히 작은 외부인 한 사람의 생각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어쨌든 오늘의 경험으로 나는 그 교회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거두어드렸고, 대형교회를 부러워할 것만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런 대형교회라면, 내부적인 네트워크만이 단단한 교회는 다른 카르텔 못지않겠지. 그러니 정치인들이 선거철만 되면 그렇게 대형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일 테다. 대형교회는 잘 훈련받을 수 있는 곳이라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는데, 타인은 발들일 수 없는 그들만의 왕국일 수 있겠구나 싶어 져서. 밥 한 끼에 마음이 돌아선 이야기를 이리도 길게 쓴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한 하루다.
오전에는 아이 등원하고 출근하느라 진이 빠졌다. 집의 지저분한 모든 곳과 고장 난 채 수리를 기다리는 가전들이 눈에 들어와 더 기운이 빠졌다. 신랑은 요새 특히 바빠서 요새 주말에는 거의 나 혼자 아이케어를 전담한다. 신랑은 피곤한 와중에도 집안일을 틈틈이 해주긴 하지만 그래도 미운 마음이 들 때가 많다. 경제 및 육아공동체일 뿐이지 우리가 부부인가 스스로 물을 때도 많다. 그런 생각에 더 울적했던 아침. 아이가 텔레비전을 보여달라고 아침부터 야단이어서 실랑이에 지쳐있었고, 갑자기 우울감이 훅 밀려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저 혈당관리 또는 호르몬의 문제일지도 모를 일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런데도 내 마음의 모든 원망이 사그라들지 않고 갑자기 신랑에게 향했고, 우리 부부관계의 유지의 효용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러다 마음을 돌리게 된 것은 출근길에 듣는 팟캐스트의 설교말씀으로부터였다. 목사님은 본 교회에 새내기 목사님들이 오시면 1-2년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사랑만 충분히 받는 경험을 하도록 하신단다. 그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존재자체로 사랑받는 경험이, 교인들을 충분히 사랑하는 목회자로 성장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그 설교를 듣는 순간, 아, 나는 신랑에게 그런 사랑을 원하면서, 나는 그를 그렇게 대하지 않았네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어느 사이 그 수많은 가사와 육아 분담 속에서 빠르게 문제해결을 하며 일하며 살아가면서 서로에 대한 사랑보다, 존재에 대한 귀중히 여기는 마음보다, 서로를 도구로 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면서 말이다. 서로 아이를 대하듯, 존재 자체로 서로를 사랑하기를. 그렇게 생각하니 미운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물론 다시 또 화가 나는 일이 계속 팝업처럼 펼쳐지겠지만, 그래도 해답은 사랑. 악뮤의 찬혁이 했던 인터뷰도 떠올랐다. 가수 이소라와의 인터뷰에서 모든 문제의 답을 생각할 때, 사랑을 먼저 꺼내면 대부분 해결이 된다는 말. 사랑. 존재 자체에 대한 긍정. 긍휼함 말이다.
지금 마음 같아선, 그 교회가 지극히 작은 자에게 보인 박대의 모습을 사랑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나는 그저 먼저 내 가족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자. 섭섭해서 잠이 안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