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
궁궐이라는 화려한 감옥에 갇혀 평생 문밖을 나서지 못했던 조선 왕실 여성들에게, 경사지를 극복하며 층층이 쌓아 올린 ‘화계’는 단순한 정원이 아닌 유일한 해방구이자 자연과의 숨통이었다.
로컬 브랜딩의 관점에서 화계는 험준한 자연 지형을 훼손하지 않고 예술로 승화시킨 한국 고유의 친환경적 공간 아카이빙이자, 닫힌 세계 속에서 치유를 일구어낸 정서적 조경의 위대한 유산이다.
궁궐은 본질적으로 권력의 무대이자 철저한 위계의 공간이다. 웅장한 조정과 높게 솟은 답도는 왕의 권위를 대변하며 선이 굵은 남성적 서사를 써 내려간다. 그러나 그 거대한 목조 건축의 장막을 걷어내고 가장 은밀한 뒤안길로 접어들면, 전혀 다른 밀도의 공간이 숨 쉬고 있다. 구중궁궐의 가장 고적한 구석에 자리한 낙선재 일원과 창경궁의 내전 영역이 바로 그곳이다. 이 안쪽 세상의 주인공은 여성들이었다.
조선 시대에 중전이나 후궁, 혹은 상궁의 신분으로 입궁한 여성들은 평생 궁궐이라는 물리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붉은 단청의 기둥과 높은 담장은 외부 세계와의 완벽한 단절을 의미했다. 한 번 들어서면 죽어서야 나갈 수 있다는 그 가혹한 운명 속에서, 그녀들은 매일 어떤 풍경을 바라보며 숨을 쉬었을까.
창덕궁의 낙선재, 닫힌 목조 창문을 열었을 때 마주하는 풍경은 이 답답한 갈증의 본질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단단한 사각 프레임의 창문 안쪽으로 다시 한번 완벽한 원형을 그리는 실내 '만월문'이 배치되어 있고, 그 동그란 우주 너머로 아스라이 기와지붕과 푸른 나무들이 걸려 있다. 이것은 프레임 안에 갇힌 프레임, 즉 물리적으로 제한된 경계 속에서만 바깥세상을 관조할 수 있었던 궁궐 여성들의 시선을 상징하는 듯하다. 가둘 수 없는 마음이 가두어진 공간을 응시할 때 생기는 팽팽한 긴장감과 아련한 슬픔이 이 둥근 창문 틈새에 고스란히 고여 있다.
공간 브랜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장소가 지닌 본질적인 단점을 어떻게 브랜드의 고유한 자산으로 전환하는가’에 있다. 조선의 조경가들은 북한산의 험준한 산자락이 궁궐 내부까지 밀고 들어오는 지형적 한계를 평평하게 깎아내는 대신, 경사면을 계단식으로 다듬어 꽃을 심는 ‘화계(花階)’라는 독창적인 건축적 해법을 창조했다.
화계는 전통 조경에서 경사면을 이용하여 층계 모양으로 단을 만들고 꽃과 나무를 심은 시설을 뜻한다. 경복궁 아미산의 화계가 인공적으로 극대화된 화려한 조형미를 보여준다면, 창덕궁 낙선재 권역과 창경궁의 화계는 훨씬 자연스럽고 사색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거칠게 다듬은 화강암 장대석을 쌓아 올린 기단 위로 봄이 되면 붉은 모란과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흙을 딛고 선 꽃들은 회색빛 석축과 붉은 벽돌에 새겨진 기하학적 전통 문양들과 어우러져 한 폭의 진경산수화를 완성한다. 담장 위에 매달린 청사초롱은 고독한 밤을 밝히던 이들의 등불처럼 처연하면서도 품위 있는 색채 대비를 이룬다.
화계의 진정한 가치는 이것이 단순히 감상용 정원에 머물지 않고, 궁궐 여성들이 유일하게 흙을 만지고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감각할 수 있는 ‘생명의 대지’였다는 점에 있다. 대궐 밖 세상의 들판을 걸을 수 없었던 그녀들은 화계의 계단을 한 칸 한 칸 오르며, 그 작은 층계 위에서 대지의 온기와 우주의 섭리를 대리 체험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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