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 나를 지치게 할 때

by앤의하루

“희망이라는 놈이 사람을 절망에 빠뜨리는 이유와 과정을 알고 싶었다.”

- 엄기호,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


같은 출발선에 섰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속도로 달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몰랐다. 함께 시작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든든했고, 서로의 걸음을 응원하며 나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언젠가는 나도 내가 바라던 곳에 닿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런데 가는 길에 잠시 멈춰야 할 때가 생겼다. 누군가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고, 나는 쉬어가야 했다. 다시 출발했을 때 그들은 이미 저만치 앞서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조금 늦어졌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내가 얼마나 나아갔는지보다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앞서 있는지를 더 자주 바라보게 되었다. 그때부터였을까. 나를 움직이게 했던 희망이 오히려 나를 초라하게 만들기 시작한 것은.

엄기호의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에서 이 문장을 만났다.
“희망이라는 놈이 사람을 절망에 빠뜨리는 이유와 과정을 알고 싶었다.”

희망이 사람을 절망에 빠뜨린다니. 처음에는 모순처럼 느껴졌다. 희망이란 힘든 순간에도 다시 일어나게 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문장을 오래 들여다볼수록 내가 지나온 시간이 떠올랐다. 나는 분명 무언가를 이루고 싶어서 시작했다. 처음부터 남들보다 잘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어제보다 조금 나아지고 싶었고, 꾸준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원하는 모습에 가까워질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그런데 함께 출발한 사람들이 하나둘 성과를 내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달라졌다. 누군가의 좋은 소식을 들으면 축하하면서도 내 자리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들의 성취가 기쁜 것과 별개로, 나는 왜 아직 여기 있는지 자꾸 묻게 되었다.

쉬어간 시간이 아쉬웠다. 그때 멈추지 않았더라면 나도 저만큼 갈 수 있었을까. 조금 더 노력했다면 지금쯤 다른 자리에 서 있지 않았을까. 이미 지나간 시간을 되짚는 동안, 지금 할 수 있는 일에는 좀처럼 마음을 쏟지 못했다. 다시 시작해도 예전만큼 잘되지 않는 날이 있었다. 애써 쌓아 올렸던 감각이 무뎌진 것 같았고, 다른 사람들은 쉽게 해내는 일 앞에서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그럴 때마다 처음 품었던 희망을 떠올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희망을 생각하면 힘이 나야 하는데, 오히려 지금의 내가 더 부족하게 느껴졌다. 내가 바랐던 모습과 현재의 나 사이에 놓인 거리가 너무 멀어 보였기 때문이다. 희망이 어느새 내가 가고 싶은 방향이 아니라, 남들만큼 가야 하는 거리가 되어 있었다.

글을 쓰는 일도 다르지 않았다. 한 편을 완성하는 기쁨으로 시작했지만, 글을 쓰는 시간이 쌓일수록 더 잘 쓰고 싶어졌다. 내 이름으로 된 바카라을 내고 싶다는 꿈도 생겼다. 누군가의 출간 소식이나 새로운 성취를 접할 때면 진심으로 축하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쪽에서는 내 글을 돌아보았다. 나는 아직 무엇이 부족한 걸까. 이런 생각이 길어질수록 글을 쓰는 시간보다 쓰지 못한 시간을 더 크게 헤아리게 되었다. 돌아보면 달리기와 글쓰기는 내게 새로운 즐거움을 알려준 일이었다. 남과 비교하지 않아도 충분히 좋아할 수 있었던 것들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나 자신에게 점수를 매기고 있었다. 어제보다 나아졌는지, 목표에 가까워졌는지, 다른 사람들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그렇게 따지다 보면 잘한 날보다 부족한 날이 더 오래 남았다.

엄기호의《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의 문장을 읽으며 생각했다. 나를 절망하게 만든 것은 희망 그 자체였을까. 어쩌면 희망을 품은 뒤, 그것이 이루어지는 모습과 시간을 나도 모르게 정해놓았던 것은 아닐까. 같이 출발했으니 비슷한 때에 도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먼저 도착하면 나도 곧 그곳에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다 쉬어가야 하는 시간이 생기자 계획에서 벗어난 사람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우리가 같은 출발선에 섰다는 사실이 같은 조건에서 출발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각자 감당해야 할 일이 달랐고, 살아가는 환경도 달랐다. 어떤 사람에게는 계속 달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지만, 누군가는 다른 일을 돌보느라 잠시 멈춰야 했다. 그 차이를 알면서도 나는 자꾸 결과만 나란히 세워놓았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나의 노력을 판단했다.

남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쉬어간 시간이 있었지만, 그 시간이 내 삶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시간은 아니었다. 나에게는 그때 감당해야 할 일들이 있었고, 그 시간을 지나왔기에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왜 그 시간을 자꾸 잃어버린 시간처럼 생각했을까. 희망은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되지만, 그 희망을 이루지 못한 바카라임까지 온전히 나에게 돌리기 시작하면 지금의 나는 늘 부족할 수밖에 없다. 더 노력하지 못해서, 더 오래 버티지 못해서, 남들보다 늦게 다시 시작해서. 그렇게 자신을 탓하다 보면 어느새 처음의 마음을 잊는다. 내가 왜 이것을 시작했는지. 무엇이 좋아서 여기까지 왔는지.


나는 여전히 글을 쓰고 싶다. 내 이름으로 된 바카라도 내고 싶고, 달리기도 조금 더 잘하고 싶다. 오늘 한 문장을 쓰고, 내일 다시 고쳐 쓰는 시간. 숨이 차서 속도를 늦추더라도 끝내 내 발로 달려온 거리. 그 시간들은 누군가의 성취와 비교하지 않아도 내게 남는다. 물론 앞으로도 다른 사람의 좋은 소식을 들으며 마음이 흔들리는 날은 있을 것이다. 부러운 마음이 들 수도 있고, 나만 뒤처진 것 같아 속상할 수도 있다. 그럴 때마다 처음의 출발선을 떠올려보려 한다. 그곳에서 나는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조금 더 오래 하고 싶었고, 지금보다 나은 내일을 만나고 싶었다. 그 마음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그러니 잠시 쉬어갔다고 해서 처음의 희망까지 잃어버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남들이 얼마나 멀리 갔는지 바라보느라, 내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한다.


아직 도착하지 못한 곳이 있다. 그래도 오늘의 나는 다시 길 위에 있다. 그것으로 오늘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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