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삼국통일

역사는 필연인가, 우연인가?

by목인 mokin

어디선가 ​맑고 깊은 종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발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니, 성덕대왕신종이 천년의 신비를 간직한 채 다가왔다.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긴 어둠의 터널이 나타나고 그 너머에 희미한 한 점의 빛이 번져 나오고 있었다. 국중박이었다. 그리고 그 빛 속에는 깊은 사색에 잠긴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반가사유상이었다. 말없이 턱을 괸 채 천오백 년의 시간을 바라보는 듯한 그 모습에, 나는 한동안 눈을 뜰 수 없었다.


​가까스로 눈을 뜨니 황금빛 물결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천마총 금관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끝없이 펼쳐진 중앙아시아 초원을 가르며 한 무리의 철갑 기마병들이 달려온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의 머리에는 천마총 금관이 빛나고 있었고, 손에는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한 계림로의 보검이 들려 있었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단숨에 알아볼 수 있었다. 문무대왕이었다. 대왕은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김일제의 후손이다." 순간 박물관이라는 공간이 사라졌다. 경주와 중앙아시아의 초원이 하나로 이어지는 듯했다. 문무대왕 비문에 새겨진 이 한 줄의 기록은 신라 왕실이 자신들의 뿌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말해 준다.
​문득 아키히토 일본국 텐노의 말이 함께 떠올랐다. 그는 "간무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며,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다."라고 말하였다. 누구나 저마다 자신의 뿌리와 정통성을 설명하려 한다. 신라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나는 다시 천마총 금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황금빛 금관 뒤로 길게 드리워진 초원의 그림자 앞에서 질문은 더욱 깊어져 갔다.


​작은 나라 신라는 어떻게 이런 문명을 만들 수 있었을까? 그리고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왜 삼국을 통일한 나라는 고구려도, 백제도 아닌 신라였을까? 이제 나는 그 답을 찾아 천오백 년 전 신라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


​작은 나라 신라는 어떻게 역사의 중심이 되었는가


​역사는 언제나 필연이었을까? 아니면 수많은 우연이 모여 오늘의 역사를 만든 것일까? 나는 경주국립박물관을 걸으며 오래도록 그 질문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김춘추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만약 김유신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645년 당태종이 고구려 원정에 실패하지 않았다면? 연개소문이 김춘추의 군사 지원 요청을 받아들였다면? 신라는 과연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을까?


​역사는 언제나 이런 가정 앞에서 우리를 멈춰 세운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면 또 다른 사실이 보인다. 한 사람의 선택은 우연일 수 있지만, 그 선택을 가능하게 만든 시대의 힘은 결코 우연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나는 다시 경주의 유물들을 바라보았다. 천마총의 금관 속에는 북방 기마민족의 역동성과 사로국의 섬세한 아름다움이 함께 살아 있었다. 박혁거세 건국신화 속에서 말과 함께 등장하는 알의 이야기도, 문무대왕 비문에 보이는 김일제의 이야기도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신라는 처음부터 하나의 문화만으로 이루어진 나라가 아니었다. 여러 문화가 만나고, 서로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면서 성장한 나라였다. 나는 신라의 힘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신라는 닫힌 나라가 아니라 열린 나라였다. 신라는 외부 문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되 그대로 모방하지 않았고, 신라의 방식으로 다시 만들어 냈다. 포용은 생존 전략이었고, 융합은 국가의 성장 방식이었다. 남의 것을 빼앗는 나라가 아니라, 좋은 것을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다시 만들어 내는 나라였다.


​법흥왕과 진흥왕 시대에 신라는 금관가야와 대가야를 차례로 병합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진정한 저력은 영토를 넓힌 데 있지 않았다. 정복한 사람들을 적으로 남겨 두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가야의 왕족은 신라의 왕족 진골이 되었다. 차별 없이 그대로 신라 슬롯 안으로 들어왔고, 그들의 기술과 문화, 인재는 새로운 국가의 힘이 되었다. 가야계 출신 김유신이 훗날 삼국통일의 중심인물로 성장한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신라는 사람을 흡수하는 나라였고, 그 흡수는 곧 통합이었다.


​나는 이것이 신라가 가진 첫 번째 힘이었다고 생각한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김유신의 업적이라고 해도 별다른 이의가 없을 것이다. 삼국통일의 영웅 김유신이 바로 통합의 산증인이자 결과물이다. 포용은 신라의 전략이었고, 통합은 신라의 경쟁력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하나가 더 있었다. 바로 국선이 이끄는 화랑도였다. 화랑은 학문을 배우고, 몸을 단련하며, 공동체를 위해 살아가는 법을 익히는 국가의 지도자 양성 체제였다. 원광법사의 세속오계는 국가와 공동체를 위해 어떠한 신념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제시한 국가관이었다. 그 정신 속에서 김유신이 성장했고, 김춘추는 지도자가 되었다. 한 사람은 칼을 들었고, 한 사람은 외교를 선택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향한 곳은 하나였다. 나라를 살리고, 통일을 이루는 것이었다.


​642년 대야성이 함락되면서 신라는 국가 존망의 위기에 놓였다. 김춘추는 먼저 고구려를 찾아갔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그는 당나라와 손을 잡는 현실적인 선택을 한다. 나당동맹은 오늘 우리의 시선에서는 이상적인 선택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시대 신라가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660년 백제가 무너지고,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였다.


​그러나 통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당나라는 한반도를 직접 지배하려 하였다. 바로 그 순간, 신라는 다시 칼을 뽑았다. 매소성과 기벌포에서 신라는 당나라 군대를 물리치며 스스로 통일을 완성하였다.


​이 장면에서 나는 우리 역사의 놀라운 공통점을 발견한다. 645년 안시성에서는 고구려가 당나라를 이겼다. 그리고 676년 나당전쟁에서는 신라가 당나라를 이겼다. 장소는 달랐지만 정신은 같았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결정한 것이다.
​나는 이것이 신라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서로 다른 뿌리를 가진 사람들을 하나의 역사 공간으로 묶어 낸 첫 번째 시도였던 것이다. 물론 이것만으로 오늘날의 한민족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나는 다시 천마총의 금관을 바라보았다. 신라는 더 이상 작은 나라가 아니었다. 신라는 가장 강한 나라였기 때문에 삼국을 통일한 것이 아니었다.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힘, 사람을 키우는 힘,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힘. 바로 그 힘이 신라를 역사의 중심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신라가 만든 것은 아직 완성된 민족국가가 아니었다. 신라는 하나의 역사 공간을 열었다. 이제 그 공간 안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을 하나의 역사 공동체로 완성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그 마지막 퍼즐을 이어받은 나라가 바로 고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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