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관과 선비

by목인 mokin

​일본에 사무라이가 있다면 조선에는 선비가 있다

​한자 ‘士(사)’는 본래 섬기다는 뜻을 가진 ‘하급 관직’을 의미하는 글자였다. 그러나 이 글자에 대한 동아시아 삼국의 시선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중국은 대부 아래에 위치한 하급 관직에 있는 사람을 사(士)라고 했고, 일본은 주군을 모시는 ‘사무라이(侍)’ 계층을 사(士)라고 했다. 일본보다 먼저 한자를 사용했고 백제의 왕인이 일본에 한자를 전파한 역사적 맥락을 보더라도 우리 역시 이 글자를 하급 관직의 의미로 사용했을 것이다.

​우리는 사(士)를, 선비 사(士)라고 읽는다.

​여기서 ‘선비’는 순수한 우리말이며 뿌리는 고구려의 하위 관직인 선인(仙人)에서 왔다. 선인과 선배는 같은 의미이며, 이 선배가 오랜 시간을 거쳐 오늘날의 ‘선비’로 변모했다고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은 대체로 이렇게 전하고 있다. 또한 선인은 고구려의 하위 관직으로 문(文)과 무(武)를 겸비한 사람이었으므로 신라의 화랑 등에 비유할 수 있겠다.

​고구려의 선인 즉 선비는 그대로 고려로 이어진다. 거란의 10만 대군을 귀주에서 궤멸시킨 강감찬 장군이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우리에게 익숙하게 강감찬 장군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 그는 무관 장군이 아니라 문과에 급제한 문관이었다. 이것이야말로 고려 선비의 참모습이었다.

​고려에 이은 조선의 선비 역시, 학문 정진과 인격 수양을 매진하면서 서가 한쪽 가까이에 칼을 걸어두었고, 남명 조식은 평생 품속에 ‘경의검(敬義劍)’을 지니고 다녔다. 그 검은 타인을 베고 굴복시키기 위한 살생의 무기가 아니었다. 안으로는 마음을 꼿꼿이 깨어있게 하고, 밖으로는 올바름을 과감하게 실천하겠다는 스스로를 향한 엄격한 다짐이었다.

​선비들은 학문과 더불어 틈틈이 연무장에 나가 활쏘기를 하며 심신을 단련했다. 과녁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는 것은 내면의 흐트러짐을 바로잡는 의식이었다. 이러한 문무겸전(文武兼全)의 문화는 조선의 행정 시스템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대부분의 지방 수령들이 과거에 급제한 문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복장은 군복이었으며, 손에는 늘 등채라는 지휘봉을 들고 다녔다. 이 땅의 선비들은 학문에 정진하되 무(武)를 통한 심신 단련을 결코 게을리하지 않았다. 오늘날 흔히 떠올리는 유약한 문인의 이미지는 조선 말기에 국권을 상실하는 과정에서 자조 섞인 스스로에 대한 푸념이자 외세에 의한 왜곡된 탓이다.

​조선의 선비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무대가 바로 임진왜란이다. 관군이 무너진 절체절명의 순간에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모으고 사선에서 진두지휘했던 조헌, 고경명, 곽재우가 모두 평소 붓을 쥐고 대의를 논하던 선비들이었다. 이러한 정신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속에서도 끊이지 않았고, 그것이 안중근과 윤봉길 의사라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 되었다. 이들 역시 대의와 학문을 닦던 선비들이었으나, 나라를 잃은 절망 속에서 한치의 망설임 없이 자신의 몸을 던졌다. 이들은 고결한 선비인 동시에, 대의를 위해 폭탄과 총탄을 든 당당한 군인이었다. 붓을 쥐던 손으로 가차 없이 불의를 심판한 이 역동성이야말로 우리 피 속에 흐르는 진짜 유전자다. 백성을 위해 의병장으로 앞장서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조선의 선비는 오직 주군의 명령에만 복종하던 일본의 사무라이와는 그 본질부터 다르다.

​일본에서는 모실 시(侍)라고 쓰고 사무라이라고 읽는다. 글자 그대로, 칼을 쥔 채 주군에 복종하고 주군만을 모시는 자들이었다. 서슬 퍼런 칼날 아래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는 오늘의 일본에 민족적 유전자를 남겼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메이와쿠’ 문화, 그리고 칼의 공포 속에서 속마음(‘혼네’)을 철저히 숨기고 겉모습(‘다테마에’)으로만 복종하는 문화가 그것이다. 사무라이의 칼날은 결국 권력의 지배 도구이자 스스로를 가두는 순종의 굴레로 남았다.

​반면, 조선의 선비정신은 불의 앞에서는 국왕에게도 목을 내놓고 직언과 직필을 서슴지 않았다. 나아가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도록 격쟁과 상언이라는 소통의 길을 열어주어, 왕의 행차를 가로막고 징과 꽹과리를 울릴 수 있게 했다. 가슴속에 경의검을 품은 이들에게 속마음과 겉행동을 다르게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비겁함이었기에, 대의명분에 따라 속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는 수오지심과 시비지심이 '의리와 깡'으로 우리의 유전자가 되었다. 일본이 갈등을 수면 아래로 숨길 때, 우리는 신문고, 격쟁, 상언 등으로 억울함과 올바른 주장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어 공론화했다.

​이 위대한 선비정신이 앞서 제1장에서 다룬 사관의 직필 정신, 그리고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이라는 삼사(三司)의 시스템에 의해 제도적으로 보호받으며 성장한 결과물이 바로 조선 특유의 공론(公論) 문화였다.

그리고 이 공론의 정서는 징과 꽹과리를 울리던 역동적인 소통의 역사를 거쳐 오늘날의 광장문화로 연결된다. 억압된 가슴속 ‘한(恨)’을 세상에 널리 알리던 그 격렬한 징과 꽹과리 소리가, 시대를 거치며 민족 고유의 ‘흥과 끼’라는 거대한 에너지로 승화되었다.

​붓끝으로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신념은 시대를 흘러내려 민초들에게까지 고스란히 계승되었다.

선비는 특정 신분 계층을 일컫는 이름으로 시작되었으나, 그들의 정신은 온 백성의 가슴으로 번져 우리의 정신문화유산이 되었다.
그리고 역사의 고비마다 깨어나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광장문화’가 되어 지금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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