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설레거나 아프거나
어제저녁 딸이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운동 마치고 집으로 가던 길에 사위가 딸 손가락에 토끼풀 반지를 끼워주는 사진이었다. 나는 딸에게 웃음과 사랑 이모티콘을 보냈다. 딸은 만난 지 18년이나 되었는데도 여전히 따뜻한 사람이라고 자랑했다. ‘값비싼 금반지보다 토끼풀 반지에 감동하는 너와 딱 맞는 사람’이라며 엄지를 날렸다. 둘은 취미도 같다. 캠핑과 작년부터 빠져든 마라톤까지. 덕분에 삶이 즐거움으로 가득 찼다. 그래도 가끔 찾아오는 두려움과 서러움은 맞잡은 손으로 견뎌낸다. 그렇게 둘은 서로의 빈구석을 채워간다고 한다. 오늘도 하루 마무리를 달리기로 했다는 젊은 부부가 기특해 나는 미소 지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토끼라고 주장하던 벽시계가 조용했다. 똑딱거리며 왔다 갔다 하는 소리가 요란했는데. 사고 치기 전 아이들처럼 숨을 참고 조용히 주변을 살피는 것도 같다. 어제저녁 토끼풀 반지 사진에 내가 언젠가 받았던 꽃반지를 생각하느라 잊었나? 아니, 분명 건전지를 교체했었는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계를 벽에서 뗐다. 납작하게 자리를 차지해야 할 건전지가 튀어나왔다. 건전지를 빼내 음극과 양극을 확인하고 다시 집어넣었다. 아귀가 맞아야 세상살이가 술술 흘러가듯이. 건전지가 제대로 자리를 잡아주니 살아났다. 분침과 시침을 움직여 시간을 맞췄다. 살아 숨 쉬는 시계를 다시 벽에 걸었다. 쉼이 주는 휴식이 그렇게도 신났는지 오두방정을 떨며 몸통인 추가 춤을 추며 소리를 질렀다.
주인인 나를 닮아 혼자서도 잘 노는 시계를 뒤로하고 냉장고를 열었다. 네 칸 중 둘째 칸에 들어있는 통을 들었다. 우유에 유산균을 섞어 만든 요거트가 밤새 그물망으로 유청을 흘려보낸 후 그릭요거트가 되었다. 나는 유청이 흐를까 봐 조심스럽게 용기를 꺼냈다. 제법 단단하게 잘 만들어진 것을 한 스푼 펐다. 거기에 견과류, 블루베리, 딸기, 아보카도 반쪽과 유자청을 섞었다. 홈쇼핑에서 보던 것보다 더 그럴싸했다. 흐뭇한 마음으로 이름도 생소한 교향곡에 맞춰 거침없이 먹었다. 음악이 끝난 라디오에서 어제 내린 비로 오늘 하늘이 맑다고 한다. 마치 가을 하늘처럼 높고 푸를 거라는 말에 나는 꽉 낀 고무장갑을 벗었다. ‘이까짓 설거지쯤이야 좀 두면 어때’라며 운동화가 기다리는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매캐한 냄새가 났다. 지하 주차장 바닥 공사에 사용 중인 화학약품 냄새다. 2월 말부터 시작된 공사가 6월 초나 돼야 끝나는데 주차난과 이 고약한 냄새를 어쩔 거나. 나는 최대한 숨 참기를 하며 빠른 걸음으로 아파트를 벗어났다. ‘생태회랑 길’이라는 이름을 가진 둘레길로 갔다. 인도와 자전거 도로를 초록이 감싸고 있는 푸른 세상이다. 약 한 달 전부터 깨지거나 들린 보도블록 교체 작업 중이라 좀 어수선했다. 공사 중인 인도를 피해 걷거나 뛰는 사람들이 자전거 도로로 몰렸다.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안전제일’ 테이프를 건드리지 않으려 조심했다. 나도 그들 뒤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며칠 전에 걸을 때는 보지 못했던 토끼풀이 여기저기 보였다. 어제저녁 딸이 보내온 토끼풀 반지 사진 덕분인가 보다. 문득 나도 오래전 그날처럼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싶어졌다. 오늘은 비록 내가 만들어야 하지만, 나도 왼손 새끼손가락에 끼어야겠다. 그리곤 푸른 하늘에 반지가 보이도록 손을 높이 들고 사진을 찍어 딸에게 보내야지.
내가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경쾌한 음악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블록 한 보따리를 실은 지게차가 길을 터주라며 내는 소리였다. 길을 걷던 사람들이 마치 구급차를 만난 도로 위 자동차처럼 길을 열었다. 서로의 안전을 염려하며 '비키세요'라고 외치는 소리도 들렸다. 나도 그들과 같이 오른쪽 가장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지게차가 음악소리를 남기고 지나간 길을 사람들이 다시 걸었다. 꽃이 진 벚나무에 가려져있던 나도 걸음을 옮겼다. 걷다가 인도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블록 교체를 하는 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미소와 목례로 전했다. 벚꽃이 떠난 자리를 차지한 철쭉꽃들에 파묻힌 나는 평소보다 느린 걸음으로 둘레길을 걷고 집으로 왔다.
개수대에서 뒹구는 그릇들을 씻으러 고무장갑을 끼는데 토끼풀 반지가 생각났다. 지게차 음악 소리에 한쪽으로 비켜서느라 잊었다.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그릇을 닦으며 흘러간 옛 노래를 흥얼거렸다. 어젯밤부터 계속 내 머릿속을 휘젓던 노래다. ‘생각난다. 그 오솔길. 그대가 만들어 준 꽃반지 끼고…’ 눈치 없이 눈물이 흘렀다. 나이 들어가면서 용서와 망각이 필요하다던데. 오래전 추억이 비껴갔나 보다. 지금도 여전히 잊히지 않고 애틋한 기억으로 남아있으니 말이다. 그것들이 지난날의 일부와 뒤섞여 내 가슴을 찔렀다. 아린 통증이 훌쩍이는 눈물로 시계추 소리와 꽃반지 속으로 스며들었다.
https://youtu.be/DhZ967FQVps?si=LCUqJn5k_qGRGQB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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