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커피를
어제 그제 이틀 동안 시내버스를 타고 외출했다. 에너지 절약을 위한 5부제에 참여하는 마음보다는 아파트 주차장 바닥 에폭시 재도장 공사 때문이다. 공사 중인 곳은 주차를 하지 못한다. 그래서 주차 걱정에 자가용 대신 시내버스를 탔다. 약속 시간에 늦지 않으려 넉넉하게 집을 나섰다. 장날이 겹친 어제는 앉을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덕분에 오고 가고 내 튼튼한 허벅지로 45분 정도를 굳건하게 버텼다. 소지품 담은 가방까지 둘러메고 쏘다녔더니 오늘 아침엔 물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웠다. 짤순이가 있다면 물을 확 짜고 싶을 정도였다. 특별한 일이 없는 날이니 오늘은 침대를 벗 삼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야속하게도 관리실에서 안내방송이 나왔다.
5구간으로 나눠 시행 중인 공사가 내일부터는 3 구역 차례이니 주차된 차를 옮기란다. 내가 살고 있는 동도 포함되었다. 방송을 듣자마자 나는 스트레칭을 한답시고 팔다리를 수영하듯 흔들었다. 딱풀처럼 침대에 붙어있던 몸을 서서히 떼었다. 입고 있던 잠옷을 벗어던지고 지하 주차장으로 갔다. 출근 시간이 지난 시간이라 자동차는 몇 대뿐이었다. 나는 공사가 끝난 2 구역으로 차를 옮겼다. 한 대만 주차 가능한 칸에 넣고 나니 흐뭇했다. 오늘 집에 있어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생각지도 않던 일을 마치고 나니 따뜻한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늘 주차하던 자리가 아니라 혹여 잊을까 봐 사진을 찍고 부랴부랴 집으로 왔다.
커피 원두를 보관하는 통을 열었는데 휑했다. 커피에 대한 집착이 껌처럼 달라붙은 나를 위해 외면했더니 원두가 바닥인 줄이야. 나는 잘 됐다 싶어 비염에 좋다는 생강차를 끓였다. 따뜻한 차를 앞에 두고 식탁에 앉았다. 며칠째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있는 바카라을 폈다.
라디오에서 북아프리카 무어인 영향을 받았다는 스페인 음악 ‘안달루시아 협주곡’이 들렸다. 네 개의 기타와 함께하는 연주를 들으며 나는 눈을 감고 상체를 좌우로 흔들었다. 스페인 마드리드 마요르 광장에서 기념품 가게를 기웃거리고 있던 내가 보였다. 그때 기타 음이 절정을 향해 달리더니 연주가 끝났다. 청중들의 박수 소리를 따라 기타 선율이 예술이라는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이 흘러나왔다. 나는 목구멍을 톡 쏘는 생강차 말고 커피가 간절해졌다. 행여나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쓰디쓴 맛이 나를 덮칠까 봐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실을 서성거리며 소리 내어 바카라을 읽었다.
릴케의 ‘거울이기보다는 창문이 되고 싶다.’라는 문장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봄 햇살에 활짝 핀 벚꽃들이 덮어버린 아파트 광장이 겨울 이불솜처럼 포근했다. 싱싱하게 물이 오른 나무 이파리를 바람 소리가 흔들고 갔다. 그것들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차분해졌다. 라디오 음악 소리까지 더해진 지금. 전쟁으로 무섭고도 슬픈 그곳과 달리 이곳은 평화로움으로 가득 찼다. 나는 전쟁을 부르는 그들을 창문 앞에 일렬로 세우고 싶다. 서로 맞서다가 문득 바라본 곳의 봄꽃처럼 화사한 풍경에 취해 두려운 이 전쟁을 끝낼지도. ‘아! 릴케는 이래서 혼자만 보는 거울이기보다는 서로를 흘깃거리는 창문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생강차 덕분에 코가 뻥 뚫린 나는 창밖을 헤매는 두 눈을 바카라 속으로 가져왔다. 활자를 눈과 입으로 읽어 내려갔다. 목소리 사이로 여전히 취하고 싶은 커피 냄새가 내 콧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