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위해 한 생애를 사는 장승

허춘자. 「장승 무덤」(2026 글로벌경제신문 시니어신춘문예)

by뜰에바다

허춘자 작가의 「장승 무덤」은 이것을 사람이 썼나, 싶을 만큼 장승에 관한 모든 것을 아우른 수작이다. 어떻게 장승을 이렇듯 완벽하게 해석해 낼 수 있었을까, 싶다. 한 문장도, 묘사도 버릴 수 없어, 이보다 더한 수필을 찾아보기 어려울 지경이다.


장승 나무가 산비탈에 뿌리를 내리고 수십 년을 자란다.

장승은 처음에 나무였다. 산비탈에 뿌리를 박고 수십 년을 홀로 서 있던 나무, 봄이면 땅속 깊은 데서 물을 길어 올려 잎끝까지 밀어 보내고, 가을이면 물든 색을 아낌없이 내려놓던 나무였다. 나무는 말이 없다. 바람이 달려와 흔들어도 흔들릴 뿐 소리 내어 맞서지 않고, 눈이 온몸을 짓눌러도 휘어질 뿐 꺾임을 끝내 뿌리치지 않는다. 그 긴 침묵 속에서 나무는 무언가를 쌓아 갔다. 나무는 장승이 되기 전, 나이테라는 이름의 내력을, 옹이라는 이름의 상처를, 속으로만 삭여 굳어진 세월의 밀도를 오래 스스로 갈았다. 존재는 쓰임을 얻기 전에 먼저 깊어지는 법이다.

어느 날, 장승 나무가 장승 조각가와 만나게 되고, 그 손끝에 인사하면서 나무의 시절을 벗게 된다.

어느 날 장승 조각가 장인의 손이 나무에 닿는다. 오랜 세월 나무를 읽어 온 손, 나이테의 결을 손끝으로 헤아리고 옹이의 아픔을 손바닥 전체로 받아 낸 손이다. 손끝에는 수십 년 나무와 나눈 대화가 굳은살이 되어 박혔다. 장인은 나무가 스스로 말을 꺼낼 때까지 오래, 깊이 바라본다. 나무도 그 눈길을 느끼는지 조용히 몸을 세운다. 장승은 장인의 손이 닿는 순간 비로소 말을 시작한다. 네 안에 무엇이 있느냐고 손은 묻는다. 나무는 자신도 몰랐던 속내를 천천히 열기 시작한다. 만남이란 상대 안에 오래 잠들어 있던 것을 알아봐 주는 일이다.

짐승 나무는 조각가의 손에서 마침내 장승으로 거듭난다.

모든 창조는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다. 장인은 다만 그것을 알아보고 불러낸 사람이었을 뿐 장승은 이미 그 나무속에 있었다. 형태를 버린다는 것은 소멸이 아니라 더 깊은 본질로 건너가는 일이었다.

마침내 거듭난 장승은 마을을 지키는 임무를 띠고, 무서운 얼굴로 스스로 변신하여 세상과 마주한다. 그것은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움찔할 정도의 기개이다.

마을 사람들은 장승을 안으로 들이지 않는다. 따뜻한 방 안에서 함께 밥을 먹거나 이불을 나눠 덮는 일이 없다. 그러나 장승 없이는 마을이 온전히 지켜지지 않는다. 들어오는 것과 나가는 것을 가려내고, 반겨야 할 것과 막아야 할 것을 분별하는 그 자리를 장승은 혼자 지킨다. 외로운 자리다. 그러나 장승은 그 외로움을 등에 지고 날마다 그 자리에 다시 선다. 장승은 외로운 문지기의 숙명을 두 눈 부릅뜨고 받아들인다.

비로소 마을 사람들이 장승 앞에서 손을 모으게 되고, 장승은 신이 된다. 마을 입구에 우뚝 선 장승은 결코 흔들림 없이 생애 동안 사람들을 안위하는 신이요, 방패로서 자기 몫을 다한다.

사람들이 손을 모으는 순간, 장승은 신이 된다. 하늘이 내린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기도로 올려 세운 신이다. 수많은 기도가 쌓이고 수많은 눈물이 마르고 수많은 새벽이 장승의 몸을 씻고 지나는 동안, 나무였던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존재로 거듭난다. 그러나 장승은 그 신격을 자랑하지 않는다.

그러나 장승에게도 수명이 있어, 세상 사람들의 소원을 빌어주는 시간을 살다 보니 낡고, 썩고, 흐려지고, 무너진다.

장승에게도 수명이 있다. 비가 살을 두드리고 햇볕이 색을 빼앗고 서리가 몸속으로 파고들다 보면 어느 해 겨울, 장승은 쓰러지기 시작한다. 눈이 흐려지고 코가 무너지고 신격을 입었던 얼굴이 조금씩 지워지며 다시 나무로, 나무 너머의 흙으로 천천히 내려앉는다. 마을 사람들은 낡은 장승을 거두어 장승 무덤에 묻는다. 장승 무덤. 신을 묻는 무덤. 얼마나 장엄하고 얼마나 쓸쓸한가.

세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장승은 다시 흙과 섞이면서, 땅속에서 이듬해의 새 나무를 준비한다.

나무였던 것이 장승이 되고, 장승이었던 것이 흙이 되고, 흙은 다시 나무를 불러 세운다. 존재는 끝나지 않는다. 다만 다른 방식으로 계속된다. 그 모든 형태는 하나의 긴 문장으로 이어졌으며, 장승무덤은 그 문장의 마침표가 아니라 다음 생을 위한 숨표였다.


수필 '장승 나무'는 장승이라는 소재 하나로 수채화 같은 아름다운 수필을 완성했다. 장승을 인격화하여 마을을 지키던 장승이 퇴락하여 소멸하기까지의 과정을 우주의 이치와 섭리로 대비하여 탁월하게 묘사했다. 어떤 대화도, 사건도 섞지 않고 오직 묘사와 형상화만으로 장승의 일생을 파헤친 점을 볼 때, 타인을 불허하는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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