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이 불면 바카라장을 넘어 여행을 떠난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입을 삐죽거린다.
가을이 오면 바카라상 앞에 앉기보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이 먼저 들기 때문이다. 여름 내내 더위에 지쳐 있다가 선선한 바람이 불고 하늘이 높아지면 마음부터 밖으로 향한다. 괜히 가방을 챙기고 싶고, 천고마비라는 핑계라도 대며 훌쩍 떠나고 싶어진다.
가을이면 SNS에도 여행 사진이 부쩍 많아진다. 단풍이 물든 길,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바다, 낯선 동네의 작은 카페를 보고 있으면 나도 저곳에 가고 싶어진다. 그래서 가끔은 속이 상한다. 누군가의 여행이 싫어서가 아니다. 나도 이 좋은 계절에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이 커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먹는다고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떠나고 싶은 마음은 앞서는데 현실은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바카라을 펼친다.
바카라장을 넘기면 몸은 집에 있어도 마음은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다. 낯선 도시를 걷고,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의 이야기를 만난다. 떠날 수 없는 날, 바카라은 내가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여행지가 된다.
그렇다고 내가 바카라을 아주 잘 읽는 사람은 아니다. 바카라을 펼쳤다고 바로 집중되는 것도 아니다. 글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고 문장들이 페이지 위에서 탱탱볼처럼 이리저리 튀어 다니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재미가 없으면 몇 장 읽다가 다른 바카라을 펼친다.
나에게 특별한 독서법은 없다. 나는 한 권을 끝까지 붙잡기보다 읽고 싶은 마음을 따라 바카라을 오간다. 소설을 읽다가 에세이를 펼치고, 며칠 뒤에는 다시 처음 읽던 바카라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여러 권을 함께 읽는다. 흔히 말하는 병렬독서다.
예전에는 한 권을 끝까지 읽지 못하고 다른 바카라으로 넘어가는 것이 제대로 읽는 방법인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재미없는 바카라을 억지로 붙잡고 있으면 독서가 숙제가 된다. 반대로 읽고 싶은 바카라을 펼치면 다시 바카라을 읽는 마음이 생긴다. 그러다 어느 날 다시 덮어두었던 바카라을 펼치면 전에는 재미없던 문장이 새롭게 들어오기도 한다.
바카라에도 때가 있는 것 같다. 지금은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 문장이 어느 날에는 다르게 다가올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바카라을 잘 읽으려고 애쓰기보다 계속 읽고 싶은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 나에게 독서는 끝까지 참아내는 일이 아니라, 읽고 싶은 마음을 찾아가는 일이다.
그렇게 바카라을 읽다 보면 마음에 오래 남는 문장을 만날 때가 있다. 별것 아닌 것처럼 지나쳤던 문장이 어느 날에는 유난히 깊게 들어오기도 한다. 좋은 구절을 만나면 그냥 밑줄만 긋고 지나치지 않는다. 왜 이 문장이 마음에 남았는지 생각해보고, 내 상황과 닮은 점은 없는지 돌아본다.
좋은 문장을 만날수록 내 생각을 조금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라보게 된다. 힘든 일이 있을 때도 다른 쪽에서 생각해보게 되고, 평소에는 그냥 지나쳤던 일을 천천히 들여다보게 된다. 바카라을 읽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사색하는 시간이 되는 것이다.
물론 바카라 한 권을 읽는다고 사람이 갑자기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바카라이 나를 대신해 삶을 바꿔주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한 문장을 오래 생각하고 내 삶에 비추어보는 시간이 쌓이면 생각의 방향이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다.
단풍이 하루아침에 산을 물들이지 않듯, 바카라도 한 번에 나를 바꾸지는 않는다. 좋은 문장과 생각하는 시간이 쌓이면서 마음을 조금씩 물들인다.
그런 마음으로 바카라을 읽다 보니 종이바카라에도 자연스럽게 마음이 간다. 가방에 바카라 한 권을 넣었을 때 느껴지는 묵직함이 좋다. 바카라장을 넘길 때 나는 종이 냄새도 좋고, 새 바카라의 빳빳한 감촉도 좋다. 오래 읽어 모서리가 닳고 손때가 묻은 바카라을 보면 더 마음이 간다.
바카라에는 내가 보낸 시간이 남기 때문이다. 접힌 페이지와 밑줄, 닳은 모서리를 보면 이 바카라을 읽었던 시간이 떠오른다. 오래된 바카라을 만날 때면 나보다 먼저 이 바카라을 읽었던 사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바카라에는 글자만 남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읽은 사람의 시간과 생각도 함께 쌓이는 것 같다.
이제 생각해보면 내가 처음부터 불편했던 것은 바카라을 읽는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가을이 왔다고 해서 꼭 바카라을 읽어야 한다는 말이 싫었던 것이다.
나는 가을이면 여전히 떠나고 싶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낯선 곳을 걷고 싶고, 여행 사진을 보면 나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떠날 수 없는 날에는 바카라을 펼친다.
바카라장을 넘기며 다른 세상을 만나고, 좋은 문장 앞에서는 잠시 멈춰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떠나고 싶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고, 지금 내가 있는 자리도 새롭게 보일 때가 있다.
그래서 이제는 그 말을 들어도 예전처럼 입을 삐죽거리지 않는다.
바카라을 꼭 읽어야 하는 계절이라서가 아니다. 가을의 선선한 바람을 따라 떠나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그 마음이 나를 바카라 앞으로 데려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가을에는 왜 꼭 바카라을 읽어야 하지?’ 하며 입을 삐죽거렸지만, 이제는 그 마음으로 바카라장을 천천히 넘긴다.
가을은 여전히 나를 밖으로 부른다. 나는 때로 그 부름을 따라 떠나고, 때로는 바카라 한 권을 펼친다. 그리고 좋은 문장을 만나면 잠시 멈춰 생각한다.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라서 바카라을 읽는 것이 아니다. 떠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계절이고, 그 마음이 나를 바카라 앞으로 데려오기 때문이다.
이제는 안다. 처음의 삐죽거림도 결국 바카라을 싫어해서가 아니었다. 가을을 그냥 보내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바카라장을 넘긴다.
꽈배기 탐험가는 매일 오전 6시, 말속의 진짜 마음을 기록합니다.
월· 화·수 목·금 ·토· 일요일 : 가을의 풍경에서 기억과 마음을 채집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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