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에도 오픈런이 필요하다

by해서 Madame Proust

요즘 도서관 수강 신청하기가 정말 빡세다.


지난 학기까지만 해도 영어회화나 바이올린은 비교적 여유가 있는 수업이었다. 신청 시간을 조금 놓쳐도 자리가 남아 있곤 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느긋했다.


수강 신청이 시작되고 두 시간쯤 지나 사이트에 들어갔다.


그런데 웬걸.


마감.


영어회화도 바이올린도 이미 자리가 꽉 차 있었다.


나는 대기자 명단에 달랑달랑 매달렸다.


다행히 이번에는 신규 수강생에게 먼저 기회가 주어져 등록할 수 있었지만 조금 놀랐다.


언제부터 취미 하나 배우기가 이렇게 치열해졌지?


생각해보면 영어회화와 바이올린만 그런 것도 아니다.


발레나 요가 같은 운동 강좌는 정말 광클을 해야 한다. 인기 있는 수업은 수강 신청이 열리자마자 자리가 찬다.


예전에는 문화센터라고 하면 주부나 은퇴한 사람들이 여가를 보내러 오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런데 요즘 수업에 가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학생도 보이고 젊은 사람들도 보인다. 주말에는 엄마와 아이가 함께 수업을 들으러 오기도 한다.


사람들이 선택하는 강좌를 보고 있으면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이 보인다.


요즘 사람들은 취미도 꽤 실용적으로 고르는 것 같다.


발레와 요가는 재미도 있지만 건강과 운동을 챙길 수 있다.


영어회화는 해외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기술이다.


자격증이나 AI 관련 수업에는 새로운 기술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몰린다.


그리고 내가 특히 놀란 것은 악기 수업의 인기다.


바이올린뿐 아니라 기타, 드럼, 비올라,색소폰, 오카리나 같은 수업에도 사람들이 꾸준히 모인다.


사실 악기 하나를 개인 레슨으로 제대로 배우려면 비용이 만만치 않다. 악기도 마련해야 하고 매달 레슨비도 내야 한다.


그런데 도서관이나 문화센터의 문을 통하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선생님에게 배울 수 있고, 혼자였다면 선뜻 시작하지 못했을 악기도 한번 건드려볼 수 있다.


배움의 문턱이 낮아지는 것이다.


잘해야 한다는 부담도 조금 덜하다.


바이올린을 배운다고 모두 무대에 설 필요는 없다.


영어회화를 배운다고 시험을 볼 필요도 없다.


발레를 배운다고 발레리나가 될 것도 아니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만큼, 내 생활에 필요한 만큼 배우면 된다.


그래서 요즘의 취미는 예전의 ‘소일거리’라는 말과는 조금 달라진 것 같다.


재미있어서 시작하지만 그 안에서 건강도 챙기고 실력도 쌓는다. 여행에 써먹기도 하고, 어떤 배움은 자격증이나 새로운 일로 이어지기도 한다.


취미와 자기계발의 경계가 조금씩 흐려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모든 취미가 꼭 쓸모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취미의 가장 좋은 점이 쓸모를 내가 정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해야 해서 하는 일이 많다.


하지만 바이올린을 켜고, 영어를 배우고, 발레를 하는 것은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다.


내가 골랐고, 내가 시간을 내고, 내가 좋아서 한다.


생각해보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쓸모다.


나 역시 도서관에 바카라을 빌리러 갔다가 영어회화를 배우게 되었고, 바이올린을 다시 꺼내 들었다.


바카라 한 권 빌리러 들어간 곳에서 자꾸 다른 세계를 만난다.


영어를 만나고, 음악을 만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


그러니 수강 신청 날 사람들이 버튼 앞에서 광클하는 것도 조금은 이해가 된다.


큰돈 들이지 않고 새로운 세계 하나를 내 생활 안으로 들여놓을 수 있으니까.


어쩌면 우리는 취미를 배우러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삶의 맛을 하나씩 찾아가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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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 맛을 찾으려면 우선 수강 신청부터 성공해야 한다.


다음 학기에는 나도 알람을 맞춰놓아야겠다.


취미에도 오픈런이 필요한 시대니까.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