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규는 수첩을 준석 쪽으로 돌렸다.
며칠 전 적어놓은 품목명.
그 아래 한 글자가 있었다.
모름
준석이 메모지와 수첩을 번갈아 봤다.
“이거 맞지?”
“네.”
“전에 전화 왔다는 것도?”
태규가 수첩을 봤다.
“이겁니다.”
“근데 모른다고?”
“몰랐으니까요.”
준석이 의자를 끌어 앉았다.
“우리 거래처도 이틀째 찾고 있어.”
태규가 고개를 들었다.
“이틀째요?”
“어제 갔다가 못 구하고, 오늘 또 갔어.”
“어디까지 가봤대요?”
“한주.”
“어느 가게요?”
“그걸 모르겠어.”
태규가 메모지를 다시 봤다.
품목과 규격이 적혀 있었다.
잠시 말이 없었다.
준석이 물었다.
“찾아볼래?”
태규가 준석을 봤다.
“회사 겁니까?”
준석이 잠깐 있다가 말했다.
“아니.”
자재과 전화가 울렸다.
태규가 수화기를 들었다.
“네, 자재과입니다.”
준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통화를 마친 태규가 말했다.
“점심때 전화 몇 군데 해보겠습니다.”
준석이 바카라상 위 전화기를 한번 봤다.
“밖에서 하자.”
“네?”
“우리 거 아니잖아.”
준석은 메모지를 태규 바카라상에 놓고 나갔다.
점심시간.
둘은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공중전화 앞에 섰다.
준석이 동전을 몇 개 건넸다.
태규가 수첩을 펼쳤다.
첫 번째 가게에는 없었다.
두 번째 가게 주인은 규격을 듣더니 바로 끊지 않았다.
— 그거 한주에서 찾고 있어요?
“네.”
— 거기 말고 뒤쪽으로 가봐요.
태규가 펜을 들었다.
“어디요?”
처음 듣는 상호였다.
전화번호까지 받아 적었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한참 신호가 간 뒤 남자가 받았다.
태규가 품목과 규격을 불렀다.
잠시 뒤 대답이 돌아왔다.
—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태규가 준석을 봤다.
“지금 있습니까?”
— 봐야 돼.
“확인 좀 해주실 수 있습니까?”
— 지금 바빠.
“몇 시까지 하십니까?”
— 일곱 시.
전화가 끊겼다.
준석이 물었다.
“있다는 거야?”
“모르겠습니다.”
“가보면?”
태규가 수첩을 접었다.
“알겠죠.”
점심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둘은 회사로 돌아갔다.
오후 여섯 시가 조금 넘어 준석이 자재과 문을 열었다.
“끝났어?”
태규가 가방을 들었다.
“네.”
“가자.”
둘은 계단을 내려갔다.
퇴근 차량이 몰린 도로는 금세 막혔다.
준석은 운전대를 두드렸다.
태규가 시계를 봤다.
“닫겠는데요.”
“몇 시야?”
“여섯 시 십오 분이요.”
준석이 앞을 봤다.
“한 시간도 더 걸리겠는데.”
“그러니까요.”
차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한주에 도착했을 때는 일곱 시가 가까웠다.
둘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골목 안으로 뛰었다.
가게 몇 곳은 이미 셔터를 내리고 있었다.
“저기요.”
태규가 앞을 가리켰다.
찾던 가게도 셔터가 절반쯤 내려와 있었다.
“사장님!”
안에서 남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끝났어요.”
“아까 전화드렸는데요.”
“뭐?”
태규가 품목을 말했다.
사장이 잠깐 생각하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상자 몇 개를 뒤졌다.
작은 부품 하나를 꺼냈다.
“이거 아니야?”
태규가 받아 들었다.
준석이 메모지를 펼쳤다.
“맞는 것 같은데.”
태규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메모의 규격과 물건을 맞춰봤다.
“사장님, 이 부분도 같은 겁니까?”
사장이 물건을 뒤집었다.
“어디 들어가는데?”
태규가 준석을 봤다.
준석도 말이 없었다.
“기계가 뭐야?”
“그건 안 적혀 있는데요.”
사장이 물건을 내려놓았다.
“그럼 나도 몰라.”
준석이 벽에 놓인 전화기를 봤다.
“전화 좀 써도 됩니까?”
사장이 시계를 봤다.
“짧게 해요.”
준석이 거래처 번호를 눌렀다.
몇 번 신호가 갔다.
“여보세요. 거기 ○○공업 맞죠?”
구매 담당자는 이미 퇴근한 뒤였다.
“보전 쪽에 사람 있습니까?”
잠시 기다렸다.
다른 사람이 전화를 받았다.
준석은 메모를 보며 품목과 규격을 불렀다.
상대가 뭔가 물었다.
“잠깐만요.”
준석이 수화기를 막았다.
“이 부분 어떻게 생겼냐는데?”
태규가 물건을 들고 사장에게 물었다.
사장이 대답했다.
준석이 그대로 전했다.
다시 질문이 왔다.
이번에는 태규가 물건에 찍힌 표시를 읽었다.
준석이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잠시 뒤 준석이 태규를 봤다.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를 끊었다.
“맞대.”
태규가 물건을 내려다봤다.
“확실하답니까?”
“어.”
사장이 말했다.
“그럼 가져가요. 나도 집에 좀 갑시다.”
“현금이에요.”
준석이 지갑을 꺼냈다.
돈을 세다가 멈췄다.
태규가 쳐다봤다.
“왜요?”
“얼마 있어?”
“저요?”
“모자라.”
태규가 웃으며 지갑을 꺼냈다.
둘의 돈이 카운터 위에 올라갔다.
사장이 세었다.
“맞네.”
물건을 종이에 싸서 내밀었다.
태규가 받았다.
가게를 나와 몇 걸음 걸었을 때 준석이 물었다.
“너 얼마 냈어?”
태규가 금액을 말했다.
“기억해둬.”
“뭘요?”
“받아야지.”
태규가 준석을 봤다.
“못 받으면요?”
준석의 걸음이 잠깐 느려졌다.
“그러게.”
둘 다 웃었다.
준석이 차 문을 열었다.
다음 날 오전.
준석은 예정돼 있던 납품 확인 때문에 그 공장에 다시 갔다.
먼저 자기 회사 물건부터 확인했다.
수량을 맞추고 전표에 사인을 받았다.
담당자가 서류를 정리했다.
“됐죠?”
“네.”
준석은 가방을 닫으려다 다시 열었다.
어젯밤 가져온 물건을 꺼냈다.
담당자가 눈을 크게 떴다.
“이걸 구했어요?”
“한번 보세요.”
“어디서 찾았어요?”
“한주 뒤쪽에 있더라고요.”
담당자가 포장을 뜯었다.
“잠깐만요.”
물건을 들고 현장으로 내려갔다.
준석은 빈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십 분쯤 지나 담당자가 돌아왔다.
손에 물건이 없었다.
준석이 일어났다.
“맞습니까?”
담당자가 의자에 앉았다.
“맞아.”
준석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담당자가 웃었다.
“우리 애는 이틀을 갔다 왔는데.”
“저희도 좀 헤맸습니다.”
“저희?”
준석이 잠깐 멈췄다.
“아는 동생하고요.”
담당자가 서랍을 열었다.
“얼마 들었어요?”
준석이 물건값을 말했다.
담당자가 지갑에서 돈을 꺼냈다.
몇 장을 더 얹었다.
준석이 돈을 봤다.
“많은데요.”
“됐어요. 받아요.”
“물건값만 주시면 됩니다.”
“김 대리.”
준석이 쳐다봤다.
“우리 애 이틀 왔다 갔다 했어요.”
담당자가 돈을 다시 밀었다.
“밥이나 먹어요.”
준석은 잠시 돈을 내려다보다가 받았다.
저녁.
회사 근처 식당에서 준석과 태규가 마주 앉았다.
준석이 먼저 태규가 보탠 돈을 돌려줬다.
“맞아?”
태규가 세어봤다.
“네.”
준석도 자기가 보탠 물건값을 빼놓았다.
테이블 가운데 지폐 몇 장이 남았다.
태규가 물었다.
“이건 뭡니까?”
“기름값.”
“그럼 대리님 가지세요.”
“밥 먹자.”
둘은 그 돈으로 저녁을 먹었다.
회사 이야기를 했다.
다음 달 주문이 또 줄 것 같다는 얘기.
김 주임이 요즘 자꾸 늦게 퇴근한다는 얘기.
한주 사장이 전화할 때마다 반말부터 한다는 얘기.
태규가 밥을 먹다 웃었다.
“대리님한테도 그래요?”
“나한텐 아직 안 해.”
“왜요?”
“내가 무섭나 보지.”
태규가 준석을 쳐다봤다.
준석이 물었다.
“왜.”
“아닙니다.”
둘이 웃었다.
밥을 다 먹고 준석이 계산했다.
밖으로 나왔다.
밤공기가 제법 차가웠다.
둘은 회사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몇 걸음 가던 준석이 멈췄다.
“야.”
태규가 돌아봤다.
“네?”
준석이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계산하고 남은 지폐였다.
“남았네.”
태규가 돈을 봤다.
“얼마요?”
준석이 세어봤다.
많지는 않았다.
태규가 말했다.
“대리님 가지세요.”
“왜.”
“전 제 돈 받았잖아요.”
준석이 돈을 내려다봤다.
“그럼 이건?”
태규는 대답하지 못했다.
준석도 말이 없었다.
차 한 대가 두 사람 옆을 지나갔다.
준석은 지폐를 반으로 접었다.
지갑을 열었다.
평소 돈을 넣어두는 칸에 넣으려다 손을 멈췄다.
옆 칸을 벌렸다.
거기에 넣었다.
지갑을 닫았다.
“가자.”
둘은 다시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