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맞은 당분은 돌아오지 않는다

회사 냉장고 음식 훔쳐 먹는 사람들의 심리

by비타민W
도둑맞은 당분은 돌아오지 않으니,
복수의 달콤함이라도 맛봐야 했다

‘남의 여자를 탐하지 말라.’ 십계명 중 하나이자 성경에 나온 유명한 문구다. 비단 탐내지 말아야 할 것이 여자뿐일까? 온라인 게임인에게 진짜 탐내지 말아야 할 것은 따로 있다.

바로 동료가 소중하게 냉장고에 보관해 놓은 ‘간식’이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막상 당하면 황당함이 멈추지 않고 그날 저녁 폭식을 하기 전까지는 도저히 분노가 해소 안 되는 악행 중의 악행이다.


회사 탕비실은 인격의 민낯이 드러나는 곳이다. 그곳에는 이름표를 붙여둔 남의 간식이라도 귀신같이 찾아내 털어가는 ‘유령’들이 산다.




사대주의 유령

내가 근무했던 회사의 탕비실에는 유령이 살고 있었다. 냉장고 속 간식이 자꾸 사라지는데, 심증만 있을 뿐 범인을 잡지는 못하던 터였다. 다른 동료들과 함께 먹으려고 사 온 비싼 간식들을 꺼내보면 꼭 한두 개씩 비어 있었다. 봉투 외관에는 소유자의 이름이 명확히 명시되어 있었는데도 말이다.


여러 건의 절도를 당하며 나는 다양한 시도를 해보았다. 외국인들과 함께 근무하는 회사였기에, 하루는 포스트잇에 한글 대신 영어 이름으로 간식에 표기를 해두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나의 간식은 안전했다. 훔쳐 먹는 와중에도 국적을 가리는 범인의 기묘한 사대주의에 오기가 생겼다. 도대체 어떤 인간이 절도에도 선택적 글로벌 마인드를 발휘하는 걸까? 범인의 얼굴이 점점 궁금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범인을 잡게 된 시작은 사소한 실수였다. 간식을 꺼내다 실수로 브라우니 한 개를 바닥에 떨어뜨린 것이다.

'아, 아까워… 정말 멀리까지 가서 사 온 건데. 이거 얼마짜리인데.'

속상해하며 쓰레기통에 버리고 자리로 돌아왔는데, 문득 머릿속에 번뜩이는 생각이 스쳤다.


나는 쓰레기통을 뒤적여 브라우니를 꺼냈다. 그리고 정성스럽게 재포장한 뒤 내 이름을 큼지막하게 적어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니나 다를까 유령은 내 미끼를 덥석 물었다. 나는 일부러 사무실이 떠나가라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음식물 쓰레기로 버리려고 봉투에 넣어놓은 브라우니가 사라졌네요? 봉투만 남았어요!

그거 일반 쓰레기통에 있던 건데 어떡해~!"


범인은 스스로 자백하지 않았지만, 감출 수 없는 공기의 흐름으로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팀장 A 씨가 붉어진 얼굴로 나에게 짜증 섞인 말을 내뱉었기 때문이다.


“아니, 쓰레기를 왜 냉장고에 넣어요?! 바로바로 버렸어야죠! 참나~”


그는 평소에 냉장고를 열어 내용물들을 빤히 쳐다보고는 했다. 그리고 "뭐 찾으세요?"라고 묻는 내 질문에는 "아니에요" 하고 빠르게 자리를 피하고는 했다. 그 몇 번의 마주침으로 인해 나는 늘 심증만 가득했다.


범인은 끝내 자백하지 않았지만, 자백은 나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미각적 트라우마를 선사한 레몬청 빌런

길을 가다 보면 골목마다 편의점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나는 그들이 돈이 없어서 다른 이의 물건을 훔쳤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바쁜 회사 생활, 야근 중에 밀려오는 출출함, 아무도 없는 적막한 사무실, 편의점까지 나가기는 귀찮고 번거로움. 이 모든 요인이 탕비실의 유령을 배출하는 비옥한 토양이 된다.


어느 날, 나는 정성껏 레몬청을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탄산수를 넣어 시원한 에이드로 마시고, 따뜻한 차로도 마실 행복한 상상을 하며 스스로의 센스에 한껏 뿌듯해하고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레몬청의 수위가 너무나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줄어든 양이 직관적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이것은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이거 분명히 누가 훔쳐 먹었다.’

분노와 동시에 나의 머리 회전이 빨라졌다.


착한 사람은 "누가 내 걸 먹었지?"라며 속상해할 때, 나같이 모난 사람은 "누가 내 함정에 걸릴까?"를 기대하며 덫을 놓는다. 도둑맞은 당분은 돌아오지 않으니, 복수의 달콤함이라도 맛봐야 했다.


나는 유령에게 인생의 신맛을 제대로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얼마 남지 않은 레몬청에 깔라만시 원액을 사정없이 들이부었다. 안 그래도 수제 레몬청이라 과하게 달지 않았는데, 깔라만시의 강력한 신맛이 더해지니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일 지경이었다.


얼마 뒤, 드디어 정수기 앞에서 “읍!!” 하는 단말마의 비명이 들려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소리가 난 곳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옆 팀의 B 씨가 내 레몬청 뚜껑을 열어둔 채, 다급하게 생수를 들이켜고 있었다.


"이거 드셨어요?" 내 날카로운 질문에 그녀는 오히려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당당하게 반문했다.

“네, 왜요?”

“이거 제 건데요? 마음대로 드신 거예요?”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는지 그녀는 레몬청 뚜껑도 닫지 않은 채 "아, 죄송해요!"라는 말만 남기고 잽싸게 자리를 떴다.


범인을 잡았다는 도파민과 변명조차 성의가 없는 반응에 화가 쉽게 가라앉지 않았지만, 탕비실 밖으로 나와 보니 이미 많은 동료가 그 실황을 목격한 뒤였다. 유령에게 같은 피해를 입었던 동료들의 축하 메시지로 내 노트북 상태창은 한동안 쉴 새 없이 반짝였다.


곧이어 도둑의 건강(?)을 생각한 나의 '깔라만시 배려' 덕분에, B 씨가 오전 내내 속 쓰림을 호소했다는 작지만 훈훈한 소식도 함께 전달받을 수 있었다.




뻔뻔함의 극치, ‘공짜 샘플’ 가스라이팅 빌런

B 씨는 그나마 양반이었다. 최소한의 수치심이라도 느낄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내가 만난 진짜 유령은 체급부터 급이 달랐다. 거구의 덩치에 식성은 지나치게 고급스러웠던 빌런 C 씨다.


C 씨는 뻔뻔함의 극치를 달리는 동시에, 비싼 과일만 귀신같이 골라내는 신비한 미각을 가졌다. 그녀는 탕비실에 흔하게 굴러다니는 믹스커피나 눅눅해진 비스킷 따위는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 시장에 샤인머스캣이 막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 그녀의 타깃은 늘 샤인머스캣, 포멜로(자몽), 애플망고 같은 단가가 높은 ‘고급 과일’이었다.


어느 날, 애지중지 아껴둔 비싼 과일이 사라진 것을 발견한 한 동료가 분노해 범인 추적에 나섰다. 범인은 너무나 쉽게 잡혔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사무실에서 과일이 주는 상큼 달콤한 향기는 지나가는 사람의 시선을 잡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범인은 C 씨였다. 추궁하는 동료에게 그녀가 던진 한마디는 가히 압권이었다.


“어머, 이거 개인 거였어요? 난 또 거래처에서 온 샘플인 줄 알았지~ 담부턴 이름 크게 써놔요. 내가 다음에 맛있는 거 사줄께요”


샘플이라니. 공짜 샘플 중에 왜 믹스커피는 쳐다도 안 보시고, 귀하고 맛있는 것만 쏙쏙 골라 드시는지.

그 사건 이후 사람들은 간식마다 포스트잇을 덕지덕지 붙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녀의 악명은 회사 내 널리 널리 퍼져나갔다.




뻔뻔함에는 광기로 대응하라

남의 귀한 음식을 멋대로 털어가는 인간들에게 굳이 예의를 차려줄 필요는 없다. 그들에게는 백 번의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설득보다, 눈물이 쏙 빠지는 강력한 미각적 트라우마나 확실한 슬롯적 매장(?)이 훨씬 효과적이다.


나는 길게 참지 않는다. 회사라는 뜨거운 공간은 가만히 있어도 화가 차오르기 쉬운 구조다. 그런 공간에서 하루를 버티기 위해 소중히 준비한 내 간식을 빼앗기는 것은, 내 돈을 쓰고 도리어 화를 사는 꼴이다. 그러니 평화를 깨뜨린 유령들에게 선사할 정의 구현에는, 때로 약간의 광기가 필요한 법이다.


탕비실의 유령들은 늘 같은 착각을 한다. 남의 간식은 공짜라고.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오늘 훔쳐 먹은 당분은 잠시 달콤할지 몰라도, 그 순간 잃어버린 평판은 생각보다 오래 남는다.

그리고 평판은 레몬청보다 훨씬 비싼 법이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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