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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의실의 문은 두꺼웠다. 그런데도 목소리는 넘어왔다.
"7페이지. 태원로지스 영업이익."
문재욱 전무의 목소리는 낮고 평평했다. 이준은 회의실 밖 복도에서 여분의 자료 묶음을 안은 채 서 있었다. 자료 세팅 보조. 그것이 계약 해지를 앞둔 인턴에게 주어진 마지막 일이었다.
"화면에는 이백십억이라고 떠 있는데, 제 손에 있는 인쇄물에는 백칠십억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어느 쪽 숫자로 우리가 삼십 분을 얘기한 겁니까."
침묵. 종이 넘기는 소리. 누군가의 헛기침.
"버전 착오가 있었습니다. 임원분들께 사전 배포된 파일이 구버전이라……."
오태석 부장의 목소리는 회의실 안에서 반 옥타브 높게 떠 있었다.
"구버전."
문재욱이 그 단어를 한 번 굴렸다.
"구버전하고 최종본하고 로지스 이익이 사십억이 다르다. 버전 관리 얘기가 아니지 않나, 이건."
그 문장은 이상하게 조용했고, 조용해서 복도까지 선명하게 닿았다. 이준은 그 순간 자신이 들은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몰랐다. 다만 사십억이라는 숫자가, 야단이 아니라 질문처럼 발음되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회의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이준은 김성재가 복도 끝에서 통화하는 것을 보았다. 낮고 빠른 목소리. 끊고 나서 김성재는 화장실에 다녀왔고, 넥타이를 고쳐 맸고, 오태석 부장이 나오기를 문 옆에서 기다렸다. 부장이 나오자마자 반보 옆에 붙어 무어라 속삭이며 함께 걸어갔다. 죄송합니다, 로 시작해서 인턴이, 로 이어지는 문장의 모양이 입술만 봐도 읽혔다.
사고는 아직 회의실 안에 있는데 바카라임은 벌써 복도에서 주인을 찾고 있었다. 이준은 자료 묶음을 고쳐 안은 채 그 광경을 끝까지 보았다.
회의는 예정보다 이십 분 일찍 끝났다. 문이 열리고 임원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준은 벽에 붙어 고개를 숙였다. 아무도 그를 보지 않았다. 단 한 사람, 맨 뒤에 나온 문재욱이 복도 끝에서 잠깐 걸음을 늦췄다. 그의 시선은 이준이 아니라 이준이 안고 있는 자료 묶음 위에 일 초쯤 머물렀고, 그리고 사라졌다.
금요일 오전, 인사팀 면담실은 볕이 잘 들었다.
"체험형 인턴 프로그램 중도 종료예요. 해고가 아니라 종료. 이 차이는 이준 씨 커리어에 중요해요."
박소영 과장은 서류를 이준 쪽으로 돌려놓으며 말했다. 친절한 목소리였다. 친절해서 더 사무적이었다.
"김성재 대리는요."
묻지 않으려 했는데 입이 먼저 움직였다. 박 과장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다른 직원의 조치에 대해서는 말해줄 수 없어요. 그건 이준 씨도 이해할 거고."
서면 경고. 계열사 파견 검토. 김성재의 몫은 그 정도라는 것이 오후가 되기 전에 사무실 전체에 퍼졌다. 정규직에게는 절차가 왔고, 인턴에게는 결론이 왔다.
"경위서 한 장만 쓰고 가요. 형식적인 거예요."
박 과장이 내민 양식의 제목은 '임원 보고 자료 오발송 경위서'였다. 경위란에는 이미 누군가 정리한 문장이 인쇄되어 있었다.
『자료 취합 및 최종 배포는 인턴 강이준이 수행하였으며…….』
"최종 배포는 제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그렇게 고쳐서 내요. 월요일까지면 돼요."
서류를 정리하던 박 과장이, 파일을 덮기 직전에 덧붙였다. 아까보다 반 톤 낮은 목소리였다.
"쓸 때, 인쇄된 문장 위에 덧쓰지 말고 새 종이에 써요. 본인 문장으로. 그건 남는 서류니까."
요령인지 호의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이준은 요령 쪽으로 분류했다. 그 분류가 맞았는지는 끝내 확인하지 못했다.
계단참에서 민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자판기 커피를 두 개 뽑아 하나를 내밀었고, 한참을 마시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내가 뭐라도 말할까. 부장님한테. 그날 밤에 네가 메신저 보낸 거, 나도 봤다고."
"하지 마."
"강이준."
"너까지 엮여. 넌 전환돼야 되잖아. 동생 등록금."
민규는 커피를 단숨에 비우고 종이컵을 구겼다. 구겨진 컵을 쓰레기통에 던졌는데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주우러 가지 않았다.
"이건 아니지 않냐."
"회사가 아닌 것도 하는 데라는 걸 배웠다고 치지, 뭐."
이준은 웃어 보였고, 웃는 데에 생각보다 힘이 들었다.
저녁에는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준은 비상계단으로 나가서 받았다.
"회사는 어떻노. 밥은 회사에서 주나."
"주죠. 구내식당이 얼마나 큰데요."
"정직원 되면 엄마가 이불 새로 해서 올라갈게."
"네. 되면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사실을 다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이준은 계단 난간에 한참 기대 서 있었다. 열 살 때, 아버지는 야근을 마치고 돌아오는 골목에서 늘 같은 노래를 흥얼거렸다. 제목도 가수도 모르는 노래. 목말을 타면 그 콧노래가 정수리 위에서 울렸다. 쿠웅, 쿠웅, 발소리하고 박자가 꼭 맞았다. 이준은 저도 모르게 그 곡조를 따라 흥얼거렸다. 이십 년 가까이 지나도 몸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였다.
밤 열한 시 반, 27층에는 이준 혼자 남았다. 박스는 하나로 충분했다. 수첩, 충전기, 어머니가 보내준 믹스커피 한 통. 사흘 밤을 지새운 자리는 십 분 만에 처음으로 돌아갔다.
경위서를 쓰려고 노트북을 열었다가, 이준은 그 대신 문제의 파일을 열었다. 보고서_v5. 모든 것을 무너뜨린 파일. 표지 오른쪽 위에 붉은 글씨가 박혀 있었다.
[최종]
최종이 아니었는데. 이준은 한참 그 두 글자를 보다가 인쇄 버튼을 눌렀다. 복합기가 잠에서 깨어나 종이를 밀어냈다. 따뜻한 종이를 들고 자리로 돌아와, 그는 김성재의 바카라상 연필꽂이에서 빨간 펜을 뽑았다. 사인펜도 볼펜도 아닌, 채점용 같은 빨간 펜.
[최종]에 두 줄을 그었다.
그 아래 여백에 썼다.
『이 문서는 최종본이 아니다. 최종본은 v7이었다.』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유치해서 손이 멈추지 않았다. 표지 하단에는 결재란이 인쇄되어 있었다. 작성자 김성재. 검토자 오태석. 그리고 마지막 칸, 확인자. 비어 있었다. 그 회의에 오른 마흔일곱 개의 파일 중 어느 것에도 확인자는 없었다. 누군가 확인했어야 했다. 아무도 하지 않았다.
이준은 확인자 칸에 자기 이름을 눌러 썼다. 강이준. 획이 종이를 팰 만큼 힘이 들어갔다.
종이를 들고 일어섰을 때, 그는 그것을 어디에 둘 생각도 없었다. 바카라상에 두고 가면 월요일에 누군가 비웃겠지. 찢어버리면 오늘 밤의 자신이 없던 일이 되겠지. 어느 쪽도 싫어서, 그는 복합기로 걸어가 스캔 버튼을 눌렀다. 내 메일로 보내놓자. 기록은, 자리에 남으니까.
액정에 문구가 떴다.
『사용자 인증이 필요합니다. 사원증을 태그하십시오.』
이준은 목에 걸린 임시 출입증을 내려다보았다. 월요일이면 반납해야 할 카드. INTERN-07. 그는 카드를 리더기에 댔다.
삑, 소리가 유난히 길었다.
스캔 불빛이 유리판 아래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훑었다. 초록의 광선이 [최종]에 그어진 두 줄의 빨간 잉크 위를 지나는 것을, 이준은 유리 너머로 내려다보았다.
빛이 끝에 닿는 순간, 바닥이 기울었다.
정확히는 세상이 기울었다. 복합기 모서리를 붙잡았는데 손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고, 형광등이 길게 늘어나며 흘렀고, 누군가 시간의 볼륨을 급히 줄이는 것처럼 모든 소리가 낮아졌다. 이준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복합기 액정의 날짜였다.날짜가, 거꾸로 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