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기억 속의 아이를 다시 만나다

나만의 왕국이 필요했던 아이

말하지 못한 마음이 이야기가 되기까지

나는 국민학교에 입학한 뒤 세 곳의 학교를 다녔다. 2학년 2학기에 한 번, 5학년 2학기에 또 한 번 전학을 갔다.

집에서는 눈치를 보는 아이였고, 학교에서도 답을 알아도 손을 들지 못하고 속으로만 대답하는 아이였다.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목소리는 튀었고 말도 빨랐다. 가끔 칠판 한쪽에 적힌 ‘떠든 아이’ 명단에 내 이름이 올라 벌을 받기도 했다.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일에도 서툴렀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바카라을 좋아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학교에 도서관이 따로 잘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학기 초가 되면 아이들이 집에서 바카라을 한 권씩 가져왔고, 교실 한쪽에 그 바카라들을 모아 두었다. 우리는 그것을 ‘학급문고’라고 불렀다.

나는 쉬는 시간이면 늘 그 앞에 있었다. 바카라을 읽다가 종이 울려도 좀처럼 덮을 수가 없었다. 바카라상 밑에 숨겨 놓고 수업 시간까지 몰래 읽다가 선생님께 혼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어릴 때라 주로 동화를 읽었다. 바카라을 펼치면 내가 살고 있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열렸다. 그곳에서는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고,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해 속으로 삼킬 필요도 없었다.

그중 지금도 희미하게 기억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정확한 제목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기억 속에는 ‘꿈꾸는 유르크’쯤으로 남아 있다.

평범한 나무꾼 유르크는 어느 날 산에서 누군가를 도와주게 되고, 그가 구해 준 사람은 꿈속 나라의 공주였다. 공주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을 구해 준 유르크에게 두 가지 삶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기회를 준다.

현실의 왕이 될 것인가. 아니면 아무도 알지 못하는 자기만의 왕국에서 왕이 될 것인가.

현실의 왕이 되면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화려하게 살 수 있다. 하지만 늘 전쟁과 시기와 다툼 속에서 살아야 한다. 사랑하는 공주를 빼앗길 수도 있고 왕의 자리마저 잃을 수도 있다.

반면 자기만의 왕국에서는 아무도 그를 알아주지 않는다. 현실에서의 그는 여전히 평범한 사람이고 특별할 것 없는 아내와 평범한 하루를 살아간다. 하지만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 그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자신만의 왕국이 펼쳐진다. 그곳에서 그는 왕이 되고 아름다운 왕비와 함께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아간다.

유르크는 두 번째 삶을 선택했다.

나는 그 이야기가 너무 좋았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마음속에 나만의 세상을 만들었다. 현실에서는 말이 없고 소극적이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아이였지만, 상상 속에서 나는 어디든 갈 수 있었다. 마음껏 여행했고, 하고 싶은 일을 했고,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갔다.

지금 생각하면 바카라은 어린 나에게 단순한 재미가 아니었던 것 같다. 잠시 숨어 있을 수 있는 곳이었고, 마음을 다치지 않게 지켜 주는 방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나만의 왕국이었다.

그 시절 나의 생활기록부에는 늘 ‘온순하다’, ‘양호하다’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특별히 튀는 것도, 무엇 하나 눈에 띄게 잘하는 것도 없는 아이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조용한 아이의 머릿속에는 늘 이야기가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나의 꿈은 오랫동안 목사였다. 그 꿈을 이룰 수 없게 되었을 때 나는 작가를 꿈꾸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시처럼 함축적인 글이나 상상으로 만들어 낸 소설보다는 내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물론 그때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쓸 수 있을지조차 몰랐다. 그저 막연히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다.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고, 사모가 되어 살아가는 동안 작가라는 꿈은 아주 멀리 밀려났다. 하루하루 해야 할 일이 많았고, 나에게 다시 글을 쓸 시간이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쉰을 훌쩍 넘긴 지금, 나는 다시 글을 쓰고 다시 작가를 꿈꾸고 있다.

어린 날의 서러움도 쓰고 싶고, 엄마 이야기도 쓰고 싶다. 내가 살아온 평범한 하루와 그 안에서 만난 사람들의 마음도 쓰고 싶다. 살면서 아팠던 일과 견뎌 낸 시간, 늦은 나이에 다시 공부하면서 새롭게 이해하게 된 마음들도 하나씩 글로 남기고 싶다.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다.

어릴 때의 나는 남이 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나만의 왕국을 만들었는데, 이제는 내가 직접 글을 쓰며 그 왕국을 조금씩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화려한 왕국은 아닐 것이다. 많은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 오래전 유르크가 선택했던 것처럼 나에게 의미 있는 작은 왕국 하나쯤은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그 안에서 나는 지나온 나를 만나고, 사람의 마음을 배우고, 오늘의 이야기를 한 편씩 써 내려간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아직도 조금씩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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