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를 감싸는 연인, 커피

by아리김


커피는 어느새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일상에서 빼놓기 어려운 음료가 되었다.
아침을 깨우는 한 잔의 커피, 식사 후에 마시는 커피, 누군가를 만나 나누는 커피.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커피를 찾는다.

그런데 내게 커피는 단순한 음료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무언가 여유를 갖고 싶을 때면 나는 혼자서도 카페에 가 커피를 사 마시곤 한다.
몇천 원을 내고 그 여유를 사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참 괜찮은 거래다.
커피 한 잔 값으로 느긋한 시간과 기분 좋은 휴식, 그리고 잠시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 말이다.
늘 똑같이 흘러가는 하루에 작은 쉼표 하나를 찍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참 많은 시간을 바쁘게 보낸다.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려 애쓰고, 때로는 무엇을 향해 달려가는지도 모른 채 하루를 살아낸다.
그렇게 분주하게 움직이다 보면 정작 나 자신과 마주할 시간은 얼마 남지 않는다.
그럴 때 커피 한 잔은 나를 잠시 멈춰 세운다.
손에 잔을 들고, 향기를 맡고, 천천히 한 모금 마시는 동안 나는 비로소 지금 이곳에 있는 나 자신을 느낀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시간이다.



그런데 커피가 내게 특별한 이유는 여유를 선물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조금씩 서늘한 구석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즐거운 일을 하고, 부족함 없는 하루를 보내더라도 문득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지는 순간이 있다.
특별히 외로운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설명하기 어려운 고독이 찾아올 때가 있다.
어쩌면 그것은 혼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외로움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 혼자 감당해야 하는 마음의 공간이 있다.


나는 그 서늘한 공간에 커피 한 잔을 들여놓곤 한다.
은은하게 퍼지는 향기, 적당히 쌉싸름한 맛, 한 모금 머금은 뒤 입안에 남는 여운.
그것들이 어우러져 마음속에 작은 온기를 만들어 낸다.
혼자 있다는 사실이 외로움으로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나 자신과 함께하는 고요하고 충만한 시간으로 바뀌게 하는.
마치 다정한 연인이 곁에 앉아 아무 말 없이 함께 있어 주는 것처럼.
커피는 내게 그런 존재다.

물론 이 사랑스러운 연인에게도 안타까운 점이 있다.
나는 저녁에는 커피를 마시지 못한다.
자칫하면 밤을 꼴딱 새워야 하기 때문이다.
커피라는 분은 어찌나 열정적인지, 나를 좀처럼 잠들지 못하게 한다.
나는 그저 잠깐의 여유를 얻고 싶었을 뿐인데, 커피는 밤새도록 내 정신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
맛있다고 마냥 마셔서도 곤란하다.
두 잔을 넘기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내가 커피를 즐기는 것인지, 커피가 나를 붙잡고 있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이토록 매력적이면서도 지독한 커피라니.
천상의 향기를 품고 있으면서도 때로는 지옥처럼 뜨거운 밤을 선물하는 묘한 연인이다.

그럼에도 나는 커피가 좋다.
커피는 내게 혼자 있는 시간을 사랑하도록 도와준다.
누군가와 함께하지 않아도 괜찮고, 그저 나 자신으로 머무는 시간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에는 이런 존재가 하나쯤 필요한 것 같다.
언제든 찾아갈 수 있고, 대단한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아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존재.
때로는 삶의 고단함을 덜어 주고, 때로는 혼자라는 사실마저 근사하게 만들어 주는 존재.

우리는 흔히 삶이 충만해지려면 무언가를 더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삶을 채우는 기쁨이 대단한 성취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평범한 오후, 좋아하는 잔에 커피를 담아 마시며 잠시 느긋해지는 것.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흘러가는 시간을 느끼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 자신에게 잠시 머물 자리를 내어 주는 것.
오히려 이런 것들로 하루는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


아마도 내가 커피를 사랑하는 이유는 커피가 그토록 특별해서라기보다, 커피와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비로소 나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있으면 나는 잠시 세상의 요구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로 돌아온다.



그렇게 커피는 내 삶의 분주함에 쉼표를 찍어 주고,
존재의 서늘함을 은은한 온기로 감싸 준다.
나를 다른 무엇으로 만들려 하지 않고, 그저 지금의 나로 머물게 해 주는 존재.



커피는 내 존재와 함께 인생을 걸어가 주는, 참으로 멋들어진 연인이다.